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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4/25  영남신문
60년 수송 외길 - 조중훈

일제의 통제 경제가 광복 후 점차 자유 경제로 전환되면서 많은 화물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수송 수단의 절대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 해방 당시 남북한 전국을 합쳐 자동차는 약8천 대가 못될 정도였다.

 

대한민국 수송 보국의 외길을 걸어 온 한진그룹 설립자 조중훈 회장은 1920년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보(지금의 휘문중학) 재학 때 종로에서 직물점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맞아 학업을 중퇴하고, 15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진해에 있는 국비 교육기관인 진해고등해원(海員)양성소(지금의 해양대학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그는 진학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機關科)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1937년 졸업 후 일본 고베(新戶)에 있는 후지무라(藤村) 조선소에 취직되어 일본에 갔다. 17세의 나이에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3년 만에 1급 기술자 대우를 받았고 이내 2등 기관사의 자격증을 획득하여 화물(수송)선 기관사로 천진, 상해, 홍콩, 마카오, 마닐라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국제적인 도시들을 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조선회사에서 엔지니어 기술을 익힌 경험은 훗날 대한항공의 항공기나 한진해운의 선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분야로 진출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조중훈에게 좌절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1942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 목탄차 엔진을 수리하는 이연(理硏)공업사를 차렸다. 마모된 중고 트럭 엔진을 수리하는 회사였다. 일본에서 엔진 수리를 배워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광복 직후인 1945111일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그동안 저축한 돈을 모아 인천시 해안동에서 '한진상사'('韓進韓民族前進을 의미)를 창업했다.

 

자산은 트럭 한대뿐이었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것은 웃음과 겸손함 덕이었다.

 

인천에서 부두 하역 작업을 보면서 부두에서 공장까지 또 다른 수송(輸送)이 필요함을 직시했던 때문이다. 수송업이라는 블루 오션(blue ocean)의 발견이었다.

 

조중훈은 운수업의 보조(補助)를 위한 사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카바이트(금속과 탄소의 화합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물과 반응하여 열을 내어 그 열을 내는 곳에 불을 붙이면 카바이트 불빛이 된다)와 인견사(人絹絲 실중에서 길게 연속된 섬유를 몇 올 합쳐서 실로 된 것) 유통업에도 손을 된다.

 

이 사업은 당시 전력이 부족하여 카바이트를 많이 쓰고 있는 점에 착안한 것으로, 강원도 삼척에서 카바이트를 사다 도매상에 넘긴 뒤 그 돈으로 인천에 들어오는 수입 인견사를 구입하여 가내수공업 형태의 방직공장이 많이 있던 강화에 유통시키는 등 , 계절에 따라 자금을 원활하게 회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원칙을 갖고 부지런히 23년 동안 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수요는 게속 있었으며, 조중훈은 급할 때엔 중고 지프차를 직접 몰고 현장을 돌며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에 한진 상사는 꾸준히 성장하여 사업 2년 뒤인 1947년에는 보유 차량이 10여 대에 달하게 되었다.

 

아울러 10월에는 교통부장관으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취득하여 본격적인 수송 사업의 기틀을 다져 놓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중훈은 사업에는 정확한 판단 능력과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부터 터득하게 되었다.

 

그가 비상(飛上)을 시작한 건 창업 5년차, 미군과 7만 달러짜리 수송계약을 체결하면서다. 구멍가게처럼 작았던 한진 상사의 몸집은 갈수록 커졌다.

이때 당시 일화

 

1940~1950년대. 인천에서 가장 큰 염전을 운영하던 K씨는 지역을 대표하는 거부(巨富)’였다. 돈과 사람이 항상 북적이던 K씨의 회사엔 낡은 화물트럭을 운전하는 청년도 드나들었다. 많은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청년이었다.

 

성실하고 참 친절했어요. 아무리 땀을 흘려도 웃음을 잃지 않았죠. 집안 어르신들이 언젠가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면서 칭찬을 늘어놓곤 했어요

 

청년 조중훈이 여름 뙤약볕에서 쏟아내던 땀은 그건 땀이 아니었다. 희망이자 꿈이었다.

 

창업 5년째 되던 해에는 종업원 40, 트럭 30,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운송 전문회사로 성장했다. 조중훈은 근면했고, 정확했고, 사업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한진의 화물자동차 15대가 군수물자로 차출돼 파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중훈에겐 억척과 부지런함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폐()트럭 '도라꾸’(트럭의 일본말)를 얻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7년에는 처음으로 미군과 7만 달러짜리 수송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급성장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運送權)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당시 조중훈은 미군의 귀국 이사 짐까지 맡아 운송했다. 1960년 한해 계약고만 220만 달러, 용차를 포함한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18월에는 주한미군 중고 통근버스 20대를 사들여 서울 종로 2가와 인천을 오가는 버스, 당시 최초의 '직통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진고속의 시초였다. 물건을 실어 나르고 사람을 실어 나르는 운송업은 이렇게 '도라쿠한 대로 시작한 것이었다.

 

한진그룹이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린 시기는 베트남전쟁이다. 19663월부터 주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및 물류 전문 재벌로 키웠다. 이후 해양운송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며 컨테이너 전문 해운사인 대진해운(한진해운 전신)을 세웠다.

 

조중훈의 사업 수완은 남달랐다. 1967년 대진해운을 설립하고 이듬해 동양화재해상보험 , 한국공항 , 한일개발 , 인하대를 차례로 인수했다. 그의 기업가적 재능과 성실함을 눈여겨본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항공공사’(1946년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를 1962년 정부가 인수하여 만듦) 인수를 강권했다. 1969년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적자투성이 공기업을 강제로 떠넘긴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한진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경유착 특혜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잘못된 시각이다. 5·16 군사혁명정부는 KNA(대한국민항공사)를 살리고자 운영감독관을 파견하고 정부 보유 외화 중 상당 금액을 융자하기로 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하고 나섰다.

 

그에 따라 조중훈은 과거에 설립했던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을 사업 승산 없음으로 생각하여 과감히 매각했었다. KNA를 지원하여 살리기로 결정한 군사혁명정부에 맞서서 기업을 경영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사혁명정부가 살리고자 전폭 지원했던 KNA1962년에 문을 닫았다. 뒤이은 '대한항공공사역시 적자 누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있었다. 결국 파산 상태의 공기업을 조중훈이 인수하여 살려내고 세계적인 민간 항공 기업으로 키운 것이다.

 

물론 그냥 키워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정부 공기업이라는 성격 때문에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너무 많은 역()피라미드 조직이었다. 본인과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회사를 정상화시킬 방안과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했다고 한다. 조중훈은 이후 과감한 투자와 서비스로 세계 선진 항공사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대한항공의 성장은 1970년대 초반 수출품을 실어 나르는 항공 화물운송에 치중하면서 내실을 다진 것, 1970년대 중후반 시작된 중동 건설 붐에 맞추어 노동자를 실어 나르고 해외수출 판로 개척을 위해 해외로 나선 회사원을 실어 나르면서 여객운송의 규모를 키워간 전략이 적중했기에 따라온 성공이었다.

 

대한항공이 시작부터 정부 특혜로 또는 정경유착으로 흑자 공기업을 손쉽게 인수하여 키운 것으로 보는 세간의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 조중훈의 사업가적 용기와 판단, 투자, 그리고 불굴의 노력이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간 항공사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여담 하나.

친동생으로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이 있다. 조중건 고문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수송학을 전공했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5년 만에 흑자로 돌리고 이후 대한항공 사장, 대한항공 부회장을 역임하며 대한항공을 세계 유수의 항공사 반열에 올리는 데 조중훈 못지않게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1980년대 초 대한항공 사장 재직 시절에는 본인이 직접 여객기에 탑승해 승객에게 웃으며 기내 서비스를 제공해 눈길을 끌었다.

 

불하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제트기로는 DC-91, 프로펠러기로는 당시로서는 노쇠한 DC-32, DC-41, F-272, FC-27 2대로 총 8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대한항공은 보잉과 에어버스 기체를 모두 이용 중이다. 협동체기의 경우 에어버스 A220과 보잉 737-800, 900, 900ER을 운용하고 있으며, 20195월 현재 회전익기체와 비즈니스 항공기, 훈련기를 포함한 183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한진그룹은 한국에서 드문 전문 대기업집단이다. 육지()와 바다()와 하늘()의 운송에 집중했다. 그리고 종합 수송망을 갖춘 운송 그룹으로 성장했다. 누구도 권하거나 강제하지 않았다.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기업들은 거의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사업 보조에 필요한 기업들이었다. 컨설팅 업체인 베인 & 컴페니의 크리스 주크(Chris Zook)핵심에 집중하라(Profit from the Core)의 격언처럼 조중훈의 한진그룹은 핵심 사업에 집중하면서 다각화하였다.

 

한진그룹의 일원으로 19688월에 설립된 한일개발주식회사는 197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군막사를 건설하였고, 이란의 코람샤항에서 화물하역과 부두작업을 맡아 실적을 쌓았다.

 

대한항공은 물론 건설 노동자의 수송을 담당했다. 대한민국의 수출주도 경제성장으로 많은 수입물자가 들어오고 수출품이 대규모로 증가하였고, 그리고 건설기업들의 중동 건설 진출 역시 한진해운과 대한항공이 기업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자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길을 낸다는 것은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대한항공이 새로운 국가, 새로운 도시로 취항한다는 것은 그 나라, 그 도시와 외교관계 맺기였다. 그리고 돈독한 외교 관계 없이 항공사의 취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대한항공은 취항을 위해 냉전시대에 정부의 외교관이 해야 할 외교를 꾸준히 해왔고, 그것은 정부의 외교를 직·간접으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은 외교를 외교관보다 기업가가 잘 할 수 있음을 그것도 더 잘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중훈 회장은 기업의 이익과 국익을 일치시키려 노력한 전형적인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이다. 그래서 국가가 도와달라는 일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했다. “우정은 우정이고, 사업은 사업이다.”라는 본인의 원칙에 국가는 예외였다.

 

국가는 곧 '내나라였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의 '내나라는 자신의 사업의 토대였기 때문이었다. 삼성에게 국가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대상이 듯이, 한진에게 국가는 '운송보국’(運送報國)의 대상이었다.

 

한진그룹이 집중해온 항공운수산업이 어떻게 국가에 기여하는지 조중훈 본인의 글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송은 국가 기간사업의 하나로서, 국가경제 및 사회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업종이다.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것은 모든 산업의 공통된 사항이라 할 수 있으나, 국토방위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국가적 과제로 안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항공 운송업은 국가경제와 사회 및 안보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타 업종과는 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2002년 조중훈 회장 사후(死後) 한진그룹은 중공업 사업인 한진중공업을 한진그룹에서 분할하여 한진중공업 그룹으로 출범했다. 금융업 계열사인 한진투자증권과 동양화재도 있었으나, 2000년 메리츠증권 및 메리츠화재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5년에 한진그룹에서 분할하여 메리츠금융 그룹으로 출범했다.

 

고속버스 운송업인 한진고속도 있었으나, 물류운송과 항공업에 집중하기 위해 2006년 동양고속에 매각했다. 조중훈 회장 사후 형제간 재산 분할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계열사 정리로 수송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조중훈 회장의 한진그룹 성공의 여러 요인 중의 하나는 6·25 전쟁과 월남전 속에서 한진은 미군과의 계약을 체결했고, 미군과의 까다로운 계약과 계약이행 과정을 통해 시장경제에서의 계약의 중요성과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를 배웠다. 미군과의 계약 체결과 이행은 세계 시장에서 통용되는 국제적인 경영규범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조중훈이 천직으로 여긴 운송사업은 제조된 물품을 회사든 개인이든 소비자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시장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한진그룹은 교역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 시장경제 안에서 성장하였고, 교역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킨 것이고 한국경제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당시 하나의 일화.

한진상사는 195611월 미군과 계약 금액 7만 달러, 6개월 잠정으로 수송계약을 맺게 된다. 수송 도중의 사고로 인한 손해는 한진상사가 모두 배상하며, 수송에 필요한 유류는 미군이 현물로 지급하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임차한 트럭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 파카를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겼음을 조중훈 사장은 알게 된다. 용역사업 초기라서 이익을 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미군 파카를 팔아넘긴 사람들은 물품을 인도한 사인(signature)까지 받아왔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만 보면 굳이 변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조중훈은 정확한 물품 전달이라는 신용을 중시 여긴 조중훈 사장은 직원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켜 놓고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려 현금으로 추가 이익을 보태주고 1,300벌에 달하는 파카 전부를 회수하여 인계한다. 이로 인해 한진상사는 미군의 확실한 신용을 얻게 되고 이후 미군의 한진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또한 조중훈은 워싱턴으로 동생과 함께 가서 과거 한국에 주한미군으로 왔었고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장교들에게 읍소하여 미군 물자 수송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월남 퀴논항에서 물자 수송이 시작된 직후 한국인 인부들이 탄 트럭에 베트콩의 공격이 있자 인부들은 무서워 수송에 나서지 않게 된다.

 

그러자 당시 조중훈 사장은 간부진들과 함께 맨 앞에서 선도 트럭을 타고 수송단을 진두지휘하였다. 총탄의 죽음을 무릅쓴 운송이자 사업 개척이었고 그로 인해 한국인 인부(직원)들은 본국으로 월급을 송금할 수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에 이겨낸 기업이 이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담보한 기업가와 기업의 노력이 없었다면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수송 외길에 종사했다. 정석은 스무 살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선박기술을 배웠다. 해방과 함께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한 것이 스물다섯 살이다. , 바다, 하늘 길을 열어 한진그룹을 육해공(陸海空)을 뒤덮는 종합운송 그룹으로 키워 10대 그룹에 올려놓았다.

 

모든 창업주 1세대들이 그렇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정석처럼 수송외길을 걸어온 이는 흔치 않다. 남이 닦아 놓은 터에 뛰어들어서 경쟁을 벌이기보다 먼저 생각한 일에 남보다 앞서가려고 노력했다. 정석은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철저히 경계했고 모든 역량을 수송에만 집중했다.

 

내가 걸어온 길자서전에 실린 어록을 통해 수송 외길을 고집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수송 활동은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이후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고, 그 수단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송은 인체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공간의 이동은 삶의 필수적 요소이고, 시간의 단축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이다

    

사업은 예술이라고 말해온 조중훈 회장은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은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 좋은 평가의 밑바탕에는 신용이 있었다. 민군과의 군수품 수송사업을 시작할 당시 초반부터 이윤을 남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신용을 두텁게 쌓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정석은 신용을 바탕으로 6.25 전쟁 직후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섰고, 석유파동을 헤쳐 나갔다.

 

항공사업도 마찬가지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는 문제는 사업상의 손익 계산을 떠나 기업가로서의 소명의식과 국익을 위한 봉사라는 신념이 필요했다. “월남에서 고생하며 모든 돈을 밑 빠진 독에다 쏟아 붓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당시 중역들의 반발도 완강했다.


정석은 육해공 삼위일체를 이룬 수송 기업의 구축을 위한 뚝심으로 직원들을 설득했다. 분단국이라는 지정학적인 약점과 보유 항공기의 노후와 기술 인력의 태부족을 딛고 태극 마크를 날개를 단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만드는 데 초석을 다졌다.

 

조중훈 회장은 20021117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5년에 수송업체인 한진상사를 창립하여 수송사업에 전념하였고, 당시 대한항공 , 한진해운 , 한진, 한진중공업 등 21개 계열사로 구성된 자산 24조 규모의 육··공 종합 수송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조중훈 회장은 휘문고보 중퇴라는 학업 중단 때문인지 항상 지식에 목말라 했고 새벽 4시면 일어나 방대한 독서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회사 직원 중 대학을 다니고 싶은 직원(입사 2년 후부터)들을 위한 사내(社內) 대학인 '정석대학을 세웠고 인하대학 을 인수하여 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도라꾸’ 1대로 시작하여 항공기 183대의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웠고, 하늘길과 바닷길을 개척해 수출입국의 기틀을 다졌다.

 

월정사 스님은 조중훈 선대 회장은 월남전에서 터지는 탄피를 모아서 월정사 범종을 만들었고, 죽음과 삶을 넘나들면서 오늘날의 한진을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했다.

 

1940년대 20대 조중훈 청년의 일화.

20대 중반의 사장이 낡은 트럭한대를 끌고 미군 영내 청소를 하청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운전하는 일을 맡았다.

 

한 번은 물건을 실어서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외국 여성이 길가에 차를 세우 놓고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다 차를 세우고 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녀는 차가 고장 났다며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는 무려 1시간 30분 동안이나 고생해서 차를 고쳐 주었다. 그랬더니 외국여성은 고마움의 표시로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도의 친절은 베풀고 지냅니다.”

그녀는 주소라도 알려달라는 여성에게 그는 주소를 알려주고 자리를 떴다.

 

그 다음날 그 외국 여성은 남편과 함께 그가 가르쳐 준 주소로 찾아왔다.

그는 바로 미8군 사령관이었다. 그 여성은 미8군 사령의 아내였던 것이었다.

 

8군 사령관이 다시 사례를 하려 하자 청년 조중훈은 명분 없는 돈은 받지 않습니다.”며 정중히 거절하며 도와주시려면 명분 있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8군 사령관은 명분 있게 도와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운전사입니다. 그러니 미8군에서 나오는 폐차를 내게 주면 그것을 인수해서 수리하고 그것으로 사업을 하겠소. 폐차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 주시오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서 그것은 일도 아니었다. 고물로 처리하는 폐차를 주는 것은 어려운 부탁도 특혜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기업이 오늘날 한진그룹이며 이렇게 우연한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중훈 회장의 실화이다.

 

좋은 인맥을 만들려면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줘야 한다.

베풀면 돌아온다. 상대의 가슴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

 

내가 먼저 인사하고 미소 짓고 베풀면 반드시 상상 이상으로 나에게 돌아온다.

 

진저리나는 가난을 아들에게, 또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조중훈(1920~2002) 한진그룹 명예회장.

 

그는 여전히 겸손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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