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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20  영남신문
다이너마이트 김! - 김종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대한민국 산업화 불씨를 당긴 한국의 노벨.

국가기간산업과 방위산업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긴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는 19221112일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현 천안시 서북구 부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이며, 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과 빙그레 회장 김호연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백범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전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과 사돈이다.

 

김종희는 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에 경기공립상업학교(현 서울특별시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자 김종희가 나서서 그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김종희는 이 일로 인해 경기공립상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112월에 졸업하였다.

 

김승연 회장의 아버지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 화약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1942년 일본이 세운 조선화약공판 생산부에 입사를 하게 된다. 당시 상사가 일본 사람이었는데 마츠무라라는 사람이 화약을 만드는 전문 기술자였다.

그 사람이 당시 김종희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 하겠다이렇게 말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신뢰를 쌓았다고 한다.

 

특히, 화약을 통한 김종희의 애국심은 대단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서울 홍제동 화약고에는 다이너마이트 3천 상자가 있었다. 관리인이었던 그는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화약을 지켜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다이너마이트 김이라고 불렀다.

 

6.25때 서울에 온 북한군들이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이 폭탄,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 북한군이 조선화약공판 공장으로 들이 닥쳤을 때 김종희는 나는 그냥 기술자일 뿐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해 다이너마이트를 지키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목숨을 걸고 화약을 지켜낼 만큼 집념이 강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1952년 당시 정부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 즉 적산인 조선화약공판을 민간인에게 넘기기로 해 김종희는 정부로부터 불하 받으면서 19521028일에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 했다.

 

당시 인천 공장이 전쟁으로 완전히 폭파되었는데 공장 재건을 위해설계도를 구하러 일본으로 가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경대 도서관 창고에서 설계도면을 손에 넣었다.

 

한국 전쟁 후 폐허가 된 한반도. 한국의 재기에 모두가 비관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 기반을 마련할 기틀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외신기자들도 비관적이었다.

 

전쟁 후 물자가 귀한 시절 대부분 생필품 수입에 관심을 가지던 시절 어느 누구도 선뜻 하지 않은 사업에 국산 다이너마이트 제작을 위해 뛰어들어 무모하기까지 했다.

    

당시 김종희는 화약만이 국가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 최초의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겠다.”는 그이 집념은 마침내 19564월에 인천 화약 공장을 복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였다.

 

이때 생산한 다이너마이트가 우리나라 산업화에 불씨를 당기게 된다.

힘을 상징하는 다이너마이트는 건설 분야에 혁명을 일으켰다.

 

1958년 대한민국 최초 다이너마이트 개발 성공은 우리나라 경제개발과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일반사람들은 화약이라는 것이 폭발해서 위험하다는 생각뿐이지 화약이 어떻게 유용하게 쓰이는지 잘 모른다.

 

경부고소도로를 민들 때 들판도 지나가지만 산도 뚫고 터널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다이너마이트로 산이 막힌 곳을 터트려서 터널을 만들었다.

 

경부 고속도로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건설될 수 있었을까. 당시 보잘 것 없는 장비와 시공능력으로 425km25개월 만에 뚫자 세계는 놀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는 길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꼭 집어 찾은 사람이 바로 한국화약 김종희 창업주였다. 박정희는 고속도로 착공 두 달 전인 196712월 청와대로 김종희를 불렀다.

 

"김 사장. 경부고속도로를 곧 착공합니다. 화약이 떨어져 공사 중단 소리 안 나오게 할 자신이 있소" "공장을 풀가동 해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국화약 생산직원들은 3교대로 밤새 공장을 돌려 물량이 달리지 않게 뒷받침했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경영 역정은 국토의 재건과 경제 근대화와의 궤적과 같이한다.

 

이후 한화는 승승장구 하게된다.

그런데 한국화약이 뜬금없이 아이스크림 제조(빙그레)와 호텔(프라자)사업에 왜 나섰을까. 사정이 있었다. 1970년대 초 농림부장관이 김종희 회장을 찾았다.

 

정부에서 젖소 사육을 권장하며 우유가 넘쳐나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가들이 힘들어한다며 운을 뗐다. 그러면서 베트남 주둔 미군에 아이스크림을 납품하기 위해 공장을 짓던 회사가 미군의 베트남 철군 조치로 부도가 났는데 그 업체를 인수해 공장을 돌려달라고 했다.

 

4000여 농가를 살리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 소비재에는 한 눈 팔지 않았던 김종희는 고심을 거듭했다. 그는 "농촌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다"며 나라를 위하는 일은 여러 가지"라며 경영진에게 회사인수를 지시했다.

 

호텔건설도 비슷하다. 한국화약은 서울시청 앞 노른자위 부지에 본사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 손님들이 투숙할 변변한 호텔이 없던 시절이라 서울시는 도심개발의 하나로 한국화약 사옥자리에 호텔을 건설하라고 종용했다.


"내가 밥장사까지 할 수 는 없다"며 차라리 그 땅을 팔아 떠날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서울의 얼굴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듯한 호텔 하나를 지어달라"는 끈질긴 서울 시장의 권유를 받고"관광사업도 사업보국의 길"이라며 생각을 바꿨다.

 

이왕 짓기로 했으면 선진국 호텔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호텔을 짓겠다고 마음먹고 1976년 지금의 프라자 호텔을 지었다. 지은 지 40년이 넘었다. 하지만 외관이나 호텔디자인은 지금도 세련돼 보인다.

 

나라의 경제발전 속도에 맞춰 한국화약의 사세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한국화약은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바로 이리역 열차 폭발사건이다.

 

프라자 호텔개관후 1년만인 19771111일에 터졌다. 보통 화약을 실은 열차는 무정차로 목적지까지 가는데 무슨 일인지 이틀간 이리역에서 쉬었다. 호송책임자는 날씨가 추워지자 촛불을 옆에 켜놓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게 도화선이 돼 대형사고가 나고 말았다.

 

많은 인명이 희생 됐고 이리역에서 반경 2km내의 건물이 모두 무너졌다. 인근 극장에서 공연하던 이주일 코미디언이 가수 하춘화를 업고 나와 구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 된다.

 

김종희 회장은 일간지에 사과와 보상 의지를 표명하는 사고(社告)를 두 차례 내도록 지시했다. 사재 90억원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 돈은 당시 김종희 회장의 전 재산과 다름없었다. 아파트 1190가구를 지어 피해주민들의 안식처를 새로 마련했다. 사과와 피해보상이 지체 없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정부는 보상금 90억원을 3년에 걸쳐 나눠 분담하라며 호응했다

 

주민들의 피해 보상과 복구를 진행하면서 한국화약의 자금 숨통도 터준 이례적인 조치였다. 김종희 회장은 평생 화약과 동행하면서 숱한 고비를 숙명처럼 넘어야 했다. 한국화약의 요람인 인천공장은 지금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한화기념관(박물관)이 들어섰다. 화약 제조공정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옛 시설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김종희 회장은 장학 사업에도 눈길을 돌렸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랐던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돕고자 하는 평생의 소망이 있었다.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사회 발전과 국민 문화를 향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 신념이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김종희 회장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에 백암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장학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후 1976년 국내 최고 수준의 명문 학교 천안 북일고를 개교했다. 오랜 염원이었던 육영사업의 꿈을 실현하며, 사회 환원에도 책임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천안 북일고는 야구 명문으로도 유명세를 타게 된다.

 

국가기간산업과 방위산업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사업보국의 경영이념을 가지고 살아온 김종희 회장은 1981년 향년 58세로 별세했다.

 

아직 한창인 50대 중후반에 별세한 터라 유언장이 없었고, 차남 김호연이 군복무 중이었던지라 장남 김승연이 갑작스럽게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김승연 회장 29세 때였다. 풋내기 회장은 취임 후 회사 중견 간부는 물론 신입사원들과 대화에 나서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그룹을 이끌게 된 김승연 회장은 195227일 충남 천안에서 김종희 한화그룹(당시 한국화약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미국 유학을 떠나 멘로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드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승연 회장은 젊은 혈기로 무리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회사 간부들을 설득해 석유화학산업과 에너지 사업에 뛰어든다. 1982년 한양화학 인수, 합작사인 경인에너지 경영권 확보 과정에서 김승연 회장은 뚝심 경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레저·유통 분야 등 3차 산업으로 사세를 확대했다.

 

한 가지 우스개 소리처럼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한화가 한국화약으로 그룹명을 변경하게 된 사연이다. 1990년대 초반 사업차 방문한 중국에서 환영 플래카드에 적힌 남조선폭약집단을 보고 명칭을 변경했다는 후문이다.

 

중국은 그룹의 영문명인 ‘Korea Explosives Group’을 그대로 번역했다. 서구권에서도 한국화약의 영문 명칭을 보고 테러집단으로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한화는 1992년 현재로 그룹 명칭을 변경했다.

 

29살 국내 최연소 재벌 총수 다이너마이트 김 주니어 김승연 회장. 큰 그룹을 아버지로부터 일찍 이어받아서 끌고 나가는 것을 보면 어쨌든 김승연 회장의 독특한 리더십이 있다고 봐야한다.

 

김승연 회장은 취임 1년 만에 한양화학(한화케미칼)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해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했다. 2년 뒤인 1983년에는 미국 정유회사인 유니언오일과 1969년 합자형식으로 인천에 세운 경인에너지 지분을 넘겨받았다. 그 뒤 회사 이름을 한화에너지로 바꿨다.

 

1985년 현 한화호텔&리조트의 전신인 정아그룹을 인수했고 이듬해 현 한화갤러리아의 전신인 한양유통을 사들였다. 1986년에는 야구단인 빙그레이글스(한화이글스)를 창단하고 1990년 경향신문사를 인수했다.

 

1990년대에는 해외 진출에 힘썼다. 1993년 아테네은행을 인수했고 1996년 헝가리 엥도수에즈 부다페스트은행(헝가리 한화은행)을 사들였다.

 

1999년부터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의 제안을 받아 대덕테크노밸리사업을 진행했다.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승연은 지역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행했다. 공사는 2001년 시작돼 200911월 준공됐다.

 

2000년에는 동양백화점(한화타임월드)을 인수하고, 2002년 대한생명보험(한화생명)을 인수해 2010년 한국거래소에 상장했다.

 

김승연 회장이 인수한 63빌딩 원래 주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생명보험사인 대한생명이었다. 모기업이었던 신동아그룹이 IMF로 외환위기를 넘지 못하자 대한생명은 부도를 맞는다. 대한생명은 전국적인 보험 유통망과 63빌딩까지 대한생명의 가치는 실로 대단했다. 이러한 대한생명이 매물로 나오게 되었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필사즉생의 심정으로 입찰에 참가하겠다1999년 정부의 공개입찰에 입찰을 하게 된다.

 

김승연은 대한생명 인수에 집념을 보였다. 당시 대한생명은 재무구조가 시원치 않았지만 한 달에 보험료 수입만 5천억 원씩 들어왔다. 엄청난 것이다.

거기에다가 보험회사니까 전국에 엄청난 부동산 자본을 갖고 있었고 그 부동산의 평가가치도 아주 컸다.

 

당시 한화는 금융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입장에서 대한생명을 인수 한 것은 상당히 큰 부담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김승연 회장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었다.

 

또한 국내 면세점 전쟁에도 뛰어 들었다. 한화 갤러리아는 여의도의 심장이자 대한민국의 대표 랜드마크인 63층 빌딩을 면세점 후보지로 내놓았다. 대한생명 인수에 성공하면서 한화로 주인이 바뀐 63 빌딩.

 

63빌딩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상징이며 한강의 기적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나 파리의 에펠탑처럼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당시에는 최고의 높은 건물이었다.

 

전 세계 면세점 시장 규모 1위인 한국.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불리 우는 면세점 사업권을 따기 위해 63빌딩을 건 한화. 유통 기업 오너 들의 치열했던 싸움에 한화의 김승연 회장이 면세점 사업권을 품에 앉는다.

 

당시 면세점 선정 과정에서 중하게 봤던 부분 중 하나가 면세점 운용 능력이었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과의 자신감과는 달리 한화 갤러리아는 면세점 후보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다른 기업에 비해 규모도 작고 시내 면세점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을 카드가 필요했다. 이길 확률이 별로 없는 승부의 갈림길에 선 역전의 승부사 김승연은 그 순간 “63 빌딩을 면세점 부지로 내 놓겠다며 결정적인 순간에 던진 승부수 63빌딩.

 

대한민국 대표 랜드 마크 황금빛 63빌딩은 중국인 관광객들로부터 골드바라는 별명을 얻고 필수 관광 코스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중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게 한강이다. 그리고 황금색 빌딩인 63빌딩 여기에 면세 사업장이 들어서게 되면 말 그대로 13조의 효과가 있었다.

 

63빌딩과 한강 여의도를 잇는 새로운 관광자원을 개발해 관광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다는 한화의 비전은 적중한다. 여의도 봄꽃 축제부터 불꽃 축제까지 관광 인프라를 만들어 아시아 최고의 쇼핑 랜드 마크로 태어나겠다는 비장의 카드는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말 그대로 면세점 입찰에 신의 한 수가 된 63빌딩이었다.

 

또한 김승연 회장은 여의도 6배 면적의 모래사막에 이라크 신도시 건설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김승연 회장은 뭔가를 하면 올인 하는 스타일이다. 뭘 하나 딱 마음을 먹으면 끝을 봐야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룹을 안정적이기보다는 모험적으로 끌고 간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의 통 큰 베팅은 그때그때 위기가 있으면 일단 시작을 하고 돌파해 나가자 이런 스타일이었다.

 

김승연 회장은 2018년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출범하고 한화시스템과 한화S&C의 통합 등 지배구조 변경을 통해 방산사업에 힘을 실었다. 지분이 흩어져 있던 태양광사업 역시 합병 등을 통해 의사결정구조를 단순화하며 2019년 대규모 투자를 준비했다.

 

태양광 분야와 방산 분야는 문재인 정부에서 더욱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발전 비중 20%를 목표로 하고 있고 자주국방을 위해 국방예산 증액 규모도 키우고 있다.

 

김승연 회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글로벌사업 확대, 인재 확보, 준법경영 등 3가지를 2019년 한화그룹의 경영방향으로 제시했다.

 

글로벌사업 확대를 위해 베트남을 전진기지로 삼고 인재 확보를 위해 과감하게 외부 핵심인력을 영입하자는 내용 등을 담았다. 앞으로 불어 닥칠 산업변화에 절박한 심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승연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단언컨대 앞으로 10년은 우리가 겪어온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혁명적 변화의 시기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그 10년이 한화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지금 이순간을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화의 인맥 또한 대단하다.

김종희 회장은 1946년 강태영씨와 결혼해 21녀를 뒀다.

장녀인 김영혜씨의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고 실세로 꼽히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차남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사돈댁과의 인연으로 서정귀 전 호남정유 회장(장남 이동진 처 서옥로의 부) 최종건 SK 창업주(5남 이동욱 처 최예정의 부)과 연결된다.

 

또 최예정씨의 사촌 오빠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 부인 노소영씨를 거치면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연이 닿는다.


김영혜와 이동훈의 장남 이재환은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장녀 손희영과 결혼했다.

 

장남 김승연 회장은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딸인 서영민과 결혼했다. 백두진 전 국회의장의 부인 허숙자의 적극적인 중매로 김승연은 아홉 살 어린 서울대 약대 3학년생 서영민과 결혼했다.

 

김승연의 장인 서정화는 전두환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과 민정당·신한국당·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정화 전 장관 동생이고 서정귀 전 호남석유 회장과는 6촌 지간이다.

 

김승연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회장의 부인은 김미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로 김미의 큰어머니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이다. 김호연 회장의 장인인 김신은 백범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교통부 장관, 공군 참모총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미씨의 오빠인 김휘는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아들인 김석동 전 굿모닝증권 회장과 동서지간으로 연결된다.

 

김승연 회장은 서영민과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다.

 

한화그룹을 태동시킨 불꽃같은 김종희 회장의 한화는 삼성과 한화의 방위산업체 빅딜로 몸집이 크게 불면서 재계순위가 오르는 것은 물론, 삼성의 네 개 계열사를 인수하며 국내 1위의 방위산업체가 되었다.

 

한화의 입장에서 방위산업은 중요한 사업이고 그룹의 모태가 된다.

방위산업 부문의 사업 규모를 키워서 현재15천억의 매출을 52천억까지 키울 수 있다.

 

국내방위산업 규모는 약10조원 특히, 무기도입과 개발할 때 들어가는 품목에 따라 가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삼성과의 빅딜로 방위산업 분야를 강화한 한화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 재도약했다.

 

선대 김조의 회장은 는 화약과 베어링으로 이미지가 굳혀져 있었는데 후대김승연 회장은 에너지와 석유화학 사업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바탕은 군수산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면에서는 김승연회장이 제2의 창업을 성공한 것이다.

 

화약에 대한 뚝심과 숱한 시행착오 끝에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자체 기술력으로 만든 국산 다이너마이트는 일본산 화약을 대체하여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던 김종희 회장.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화약인은 정직하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반드시 폭발하는 화약처럼"

 

화약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약속된 장소와 시간에 힘을 발휘하는 화약처럼 바르고 정직한 사람. 그리고 자신을 빛냄으로써 모두를 빛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김종희 회장이 죽은 뒤 1981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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