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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6/12  영남신문
럭키 치약 - 구인회

라디오 방송으로 울고 웃던 그 시대에는 성우가 라디오 방송의 꽃이었다.

라디오 시대에서 세상을 바꾼 텔레비전 시대로 안방극장의 문이 열렸다. 각본 없는 감동의 드라마 스포츠 세계에서는 모두가 하나였고 영웅이 탄생하기도 했다.

 

반세기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진정한 국민의 벗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봤던 단 한사람 금성사 구인회.

 

구인회는 아버지 구재서(具再書)와 어머니 진양하씨(晉陽河氏)의 장남으로 190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고종 때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으로 있던 할아버지 구연호(具然鎬) 밑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3학년에 중퇴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하였다.

 

1920년 같은 마을 허만식(許萬寔)의 딸 허을수(許乙壽)와 혼인하여 구자경(具滋暻) 64녀를 두었다. 당시 구인회가 성장할 무렵 집안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1931년에 진주에서 동생 구철회(具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을 설립하여 포목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에는 구인상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1944년에는 트럭 30대로 운수업을 시작하여 1945년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미군정청에서 허가받은 무역업 1호 업체이다.

 

그가 부산에서 사업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장인 허만식의 친척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허준구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찾아온 것이니 내 아들 준구를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 주소.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 좀 할 생각이오."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허씨 일가가 동업하는 형식으로 허씨 집안이 LG의 창업 및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민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던 1940년대 후반 설탕과 밀가루 같은 단순 제조업이 하나둘씩 생겨날 무렵 구인회는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1947년 출시된 럭키 크림은 그가 만든 첫 작품이었다.

 

구인회는 토지자본이 상업 자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남다른 판단력의 소유자 구인회는 즐거울 락()에 기쁠 희()자를 붙여 락희화학공업사를 만들고 행운을 주는 크림이라는 뜻의 럭키크림을 출시했다.

 

럭키크림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화장품 뚜껑이 당시에는 플라스틱이 아니었다.

 

화장품이 잘 팔려 주로 박스를 많이 운반하다보니 뚜껑이 깨져 화장품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미제(미국산)는 뚜껑이 달랐다. 알고 보니 그게 플라스틱이었는데 당시 국내에는 플라스틱이 없었다.

 

구인회는 195285억원의 거액을 투자해 국내 최초로 사출성형기를 들여오게 된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각종 플라스틱 제품을 시작으로 순수 우리 브랜드인 럭키치약까지.. 그가 선택한 사업은 기대이상이었다. 큰 성과를 거뒀다.

 

1952년 부산 범일동 공장에서 빗과 비누갑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빗만 쓰던 사람들은 합성수지 빗에 열광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합성수지 빗을 보고 한국에서 이런 제품이 나온 것에 감격했다고 한다.

 

1955년 럭키치약을 출시했다. 1956년에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서 럭키치약을 10만 개 무료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결국 출시 3년 만에 당시 시장을 석권한 미국제 콜게이트치약을 물리치고 국내시장을 석권했다.

 

1964년 국내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를 출시했다. 이는 세탁기의 보급과 함께 우리의 생활에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는 계기를 불렀다.

 

또한 군사정부가 들어오면서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게 LG(당시 럭키화학)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외국 담배만 못 판게 아니고 치약도 수입을 못했다. 당시 외래품은 전부 수입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국산화하기에 상당히 좋은 시기였다. 열심히 하는 자에겐 운()도 따라주는 것이었다. 당시 락희화학공업 사무실이 반도호텔에 있을 무렵 윤욱현이라는 기획실장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던 중 구인회는 새로운 사업구상을 했다.

 

구인회 : “이게 뭐냐? 음악이 좋다

윤실장 : ”하이파이 전축이라는 것입니다

구인회 : ”우리도 이거 만들면 안되겠나

윤실장 : ”사장님, 우리가 라디오도 못 만드는데 어떻게 전축을 만듭니까

구인회 : “그럼 우리 라디오부터 만들자

 

하이파이 산업에서 라디오 산업의 가능성을 알아본 구인회는 전자기술이 전혀 없었던 시기에 라디오 산업은 임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신념으로 1962년 부산 온천동에 금성사 준공식을 했고 윤욱현라는 기획실장이 지금의 LG전자를 만든 최고의 공신이었다.

 

1950년 당시 라디오는 부()의 상징이었다. 마을에 몇 안되는 라디오는 미국 또는 일본 제품이 전부였다.

 

구인회는 선진국의 전자공업 시찰을 위해 100일 동안 해외에 출장을 갔다.

선진국의 전자공업 시설은 상상 그 이상이었던 것이었다.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좋은 라디오가 많이 나왔다. 일본도 기술이 괜찮았다. 구인회는 앞으로는 젊은 사람을 시작으로 전 국민이 라디오를 갖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구인회는 라디오 생산에 사운을 걸었다. 195910월 드디어 국산 라디오 1‘A-501’이 출시되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자라 전자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당시 부품이고 인력, 기술, 자본이 전무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금성사가 라디오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시초였다. 구인회와 금성사 직원 모두가 A-501의 성공을 확신했다.

 

열악한 작업환경 국산 라디오를 만들어 낸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냈다. 당시 콤비아 라인에 2030명씩 앉아서 라디오를 생산했다.

 

처음에는 대중들은 금성사의 라디오를 외면했다. 미군부대를 통해 들여온 라디오와 중고 라디오를 수리해서 판매하는 전자상인들이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당시 열악한 전력 탓에 라디오 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자 비난의 화살은 모두 금성사에게 향했다. 그렇게 적자 운영이 수년째 계속되자 금성사 내부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 락희화학이 번 돈을 금성사가 다 까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라디오 산업을 중단하느냐 강행하느냐 갈림길에 선 구인회 그 순간 뭐든지 10년은 해봐야 안다.’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구인회는 다시 심기일전하였다.

 

당시 라디오가 가격이 비쌌다. 라디오는 선풍기와 같이 출시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선풍기도 안 팔리고 라디오도 안 팔리고 있었다.

 

라디오 한 대 가격이 금성사 직원의 3개월 급여와 맞먹다보니 팔릴 리가 없었다. 끝까지 라디오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공보부장관이 구인회에게 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에게 알릴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 했는데 구인회는 방송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다.

 

공보부장관 : “라디오 있는 집이 드물지 않습니까

구인회 : 우리 금성사가 라디오를 지원하겠습니다.

마침내 1962년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의 금성사 방문이 있었다. 정부에서 라디오 제작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부에서 라디오 보내기가 필요했던 이유는 정책을 시행하는데 정부의 홍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의 홍보 방법이 신문밖에 없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문맹률이 높았다. 그래서 글을 읽고 쓸 줄을 모르니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농촌에 앰프 놓기 운동 했고 그 후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혁명정부가 막 정권을 잡았을 시기였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새로운 홍보가 시급했고 라디오가 거기에 적합했다.

 

먼저 주요지역을 중심으로 5천대의 라디오가 순차적으로 배부되었다.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정부로서는 작전 성공이었다. 그 후 금성사 라디오 구입

비용은 당시 문화공보부 예산으로 편성하여 조달청에서 구매 의뢰하여 농협에서 나누어주었다.

 

문화공보부에서 어느 지역 농협에 몇 대씩을 줄 것인지를 편성했다.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금성사의 라디오는 다시 조명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사원수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대규모 회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 여세를 몰아 해외수출까지 성공시키게 된다.

 

그 무렵 구인회는 또 다른 제안을 받게 된다. KBS가 텔레비전을 인수한 것이 1961년이고 실제로 방송을 한 게 1961년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해도 텔레비전이 없으면 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문공부가 주관하고 방송협회에서 외제 텔레비전 2만대를 수입했다.

 

정부에서 금성사에게 해외에서 기술도입해서 국산 텔레비전을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시대변화에 편승하기보다는 늘 시대변화를 주도해온 구인회.

하지만 텔레비전 사업만큼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내에 텔레비전 제작 기술을 가진 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전자제품을 수리해서 판매하던 전자상인을 텔레비전 제작자로 영입하여 기술 제휴를 맺은 일본의 히타치로 보내 텔레비전 제작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1964년 텔레비전이 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양방송의 전신인 ‘RSB 라디오 서울이 개국했다.

 

구인회는 텔레비전 사업이 될 것이라는 판단아래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66년 마침내 국산 최초 텔레비전 ‘VD-191’을 출시했다. 금성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Gold Star’는 우리나라 전자제품의 심볼이 되었다.

 

당시 텔레비전 한 대의 가격은 약 68천원. 웬만한 직장인 1년 연봉과 맞먹었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대중은 국산 텔레비전에 열광했다.

텔레비전을 사려는 사람들이 전국각지에서 몰려들자 추첨을 통해 판매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경쟁이었다.

 

텔레비전이 처음 생겼을 때 연속극의 인기는 말도 못했다. 인기드라마 아씨드라마를 하는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드라마 속 배우들에 대해 대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탤런트 최불암은 기사식당에 텔레비전을 켜놓으면 수사반장을 저녁 730분에 시작했는데 기사들이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식당으로 들어가서 식사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거예요. 택시 잡기가 너무 힘들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죠

 

그때 사람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수사관 역할로 나오면 실제로도 수사관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 애로사항을 우리한테 부탁을 하기도 하고..”

 

마을에 텔레비전 있는 집 마당으로 다 모여 연속극을 할 때 보곤 했다.

텔레비전은 대중의 깊숙한 삶까지 파고 들었다. 지구 반대편 저 멀리서 날아온 45기의 승리에 온 국민이 TV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각본 없는 감동의 드라마 스포츠 세계에서는 모두가 하나였고 영웅이 탄생하기도 했다. 권투선수 홍수환은 사람들이 권투경기를 라디오로만 듣다가 텔레비전으로 직접 보니까 야, 저놈이 저렇게 잘했구나!”

 

금성사 TV가 종횡무진 할 즈음 구인회의 죽마고우였던 이병철이 금성사를 둘러보고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설탕을 만들던 이병철이 돌연 전자산업 진출을 선포한다.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이병철과의 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이후 금성사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계속된 금성과 삼성의 피말리는 경쟁.

구인회 회장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했고 이병철은 효율을 중시했다.

 

수없이 많은 제품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거머쥔 개척자 구인회. 전자제품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 낸 구인회.

 

남이 가지 않는 길에 첫 발을 내딛는 그의 사업가적 감각은 탁월했다.

우리가 현재 벤처산업하는 것이 2000년대부터인데 구인회 회장은 1950년대부터 이미 벤처산업을 일으켰다.

 

라디오, 텔레비전, 에어컨, 냉장고, 선풍기 등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든 제품들이었다. 상품광고에 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마케팅 감각까지.

 

창립 60년이 된 LG그룹. 기술력이 없어 해외에 의존해야했던 작은 회사는 이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결정적 순간에 더욱 빛났던 구인회의 선택이 지금의 LG그룹을 만들었다.

 

현재 LG전자는 전자제품, 모바일, 통신기기, 가전제품 등에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전 세계 100여개 사업장에서 87천 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고 매출 60조원을 넘었다. 우리도 한 번 해 보자에서 시작된 구인회의 도전정신은 전자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에 과감히 발을 내딛는 도전정신의 구인회는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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