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0.9.28 (월)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기사스크랩
 http://www.ynamnews.co.kr/news/12498
발행일자: 2019/08/24  영남신문
신성일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은막의 스타

1960년대와 70년대 수백편의 영화에 출연한 기록을 갖고 우리나라 영화의 상징 그 자체였던 대한민국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영)은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193758일 대구에서 아버지 강병오와 어머니 김연주 사이의 2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경북중·경북고와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배우 전문학원에 들어갔으며, 19573000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의 전속 연기자가 됐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으며, 이때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강신영이었던 그에에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라는 의미로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특히 1964년에는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반항적인 주인공으로 분하여 대규모의 팬덤을 이끌었다. 이 영화의 인연으로 연인이 된 배우 엄앵란과 같은 해 결혼하기도 했다.

 

맨발의 청춘 때 했던 스포츠머리와 자켓, 청바지 차림은 당시 신성일 때문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었다. 스포츠머리와 청바지 차림을 하고 신성일의 반항적인 눈빛과 힘이 들어간 멋들어진 대사를 흉내 내는 청년들이 넘쳐났었다.

 

신성일은 중년 신사 같은 분위기였던 당시의 남자배우들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외모와 긴 기럭지, 강렬한 눈빛으로 대표되는 반항아 이미지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이미지로 독보적인 스타가 되었다.

 

알랭들롱과 외모나 이미지가 많이 겹치는데, 사실 별명이 한국의 알랭들롱이다 보니 그에 맞는 역할이 주어지기도 했고 어느 정도 벤치마킹한 것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바람둥이인 것까지 비슷했다. 젊은 시절이나 나이 든 후 모습이나, 2000년대 시각으로 보아도 걸출한 미남임에는 별 이견이 없다.

 

전성기에는 하루를 넷으로 나누어 영화를 동시에 네 편씩 겹치기로 찍기도 했다. 524(추정)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 중 54편을 엄앵란과 함께 했다.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현재의 탑 인기 남자배우 3 ~ 5명은 합친 정도의 전설적인 레전드급이었다.

 

출연료도 단연 탑급으로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와는 무려 7배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1960년대 배우 출연료가 보통 18000원이었는데, 신성일 혼자 45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 그를 출연시키려는 제작사에는 출연료를 현금으로 자루에 담아와서 집 앞에서 줄을 섰을 정도라고 한다.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엄청난 수입에 비해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신성일은 선거를 비롯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스포츠카를 좋아해서 포드 머스탱을 직수입해 탔다고 하며, 처음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에서 부산 방면 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서울에서 부산을 향해서 주행하고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추풍령쯤에서 반대편에 빠른 속도로 지나간 차를 발견한 박 대통령이 "저거 누구야?"했더니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영화배우 신성일입니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이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제임스 딘처럼 사고내지 말고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위상이었다. 그의 전성기 때 그가 신상옥, 김수용, 이성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감독들과 꽤 많이 작업을 했으니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강명화(67)' '안개(67)' '내시(68)' '청춘극장(67)' '김약국의 딸들(63)' '태백산맥(75)' '왕십리(76)' 등의 영화들이 그런 작품들이고 70년대까지 이어져, ‘별들의 고향겨울여자같은 전설적인 히트작들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한국 영화는 굉장한 전성기를 이루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였지만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꽤 깊었던 시대였다. 당연히 은막의 스타는 국민적인 우상이기도 했고, 서울인구 200만 명에 불과하던 시대에 연 1억 명의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TV가 보급되기 전의 시대, 영화보기는 거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런 시대에서 지금의 드라마를 대체한 영화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편수가 만들어졌고, 20-30편 넘게 출연하는 것은 예사였다.

 

몇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지금처럼 선수층이 넘치던 시대도 아니라서 당시의 한국 영화를 몇 편 보면 같은 배우가 중복 출연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신성일은 별 중의 별 같은 존재였다. 6070년대 영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자배우로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년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도 달라질 정도였기 때문에 앞 다투어 그를 출연시키려고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신성일은 19641114일 워커힐 호텔에서 배우 엄앵란과 결혼했다. 이 엄앵란과의 결혼식은 당대 최고 톱스타 둘의 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화제가 되어 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이를 노리고 지방에서 전문 소매치기단까지 같이 상경했다가 잡힌 게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결혼식 당시 하객 수가 34백 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그야말로 대혼란 사태가 터진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생활은 아니었다.

 

신성일은 많은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거사를 자서전으로 써낸 적이 있었다. 2011년 발표된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거사를 여과 없이, 그것도 상대 여성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여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엄앵란은 평생 신성일과 이혼을 안하고 아내로서 꿋꿋하게 살았고, 그의 죽음까지 함께 동지로서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상당한 멘탈을 가진 여성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도 엄앵란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5,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였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보살의 영역에 이르렀다.

 

엄앵란은 생전 신성일에 대해 가정 남자가 아니었다. 대문 밖의 남자였다. 일에 미쳐 집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다. 집에서 하는 것은 늦게 들어와 자고 일찍 나가는 것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2011년 내놓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나는 신성일이다' 라는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왔다. 영광의 세월도 있었고,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굴욕적인 순간도 있었다. 내 혈압이 사건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면 아마도 100번은 더 죽지 않았을까 싶다며 걸어온 길을 반추했다.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으로서 말년에 이 시대 청춘들에게 고언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근 10년 이상 백수건달 생활을 할 때도 하루도 안 빼고 달리고 운동하며 심신을 단련했다며 전한 메시지는 세대를 뛰어 넘는 큰 울림을 던지고 있다.

난 젊은이들에게 정면돌파하라고 외치고 싶다. 자신을 믿고 기회가 올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려라.”

 

신성일은 1968년과 1990년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등 국내 대부분의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대종상 공로상과 부일영화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제8회 아름다운문화예술인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영화단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 1979년 영화배우협회장을 역임했고, 1994년 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신성일은 2017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투병해온 국민배우신성일은 2018114일 오전 230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원로배우 이순재는 “60년대 영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거목이 한명 갔다. 이는 팬들이 다 기억할 것이라며 신성일씨 관련 작업은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후학에게도 좋은 교본이 될 것이고, 관계기관에서도 이를 홍보해 고인을 추모하고 아쉬워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영균 명예회장은 "배우라는 직업은 행복한 직업이다. 80년을 살다 갔지만,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행복했을 것"이라며 "이제는 천당 가서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며 추도했다.

 

영화배우 신성일은 500편이 넘는 영화출연, 4편의 감독, 국회의원 3번출마 2번 낙선, 1번 당선, 뇌물죄로 수감, 엄앵란과 결혼하여 스타부부 커플, 수많은 불륜과 여성편력, 말년의 암투병, 30여차례의 국내 각종 영화상 수상, 누구보다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평생 영화만을 생각하고 살았고, 한국 영화의 60-70년대 역사 그 자체가 된 인물....

 

주연작만 507편이고 상대 여배우가 연 119명에 달했다.

 

고인을 마지막으로 봤다는 엄앵란은 “(며칠전 고인을 찾은) 딸이 마지막으로 할 말 없냐고 하니, ‘재산없다라고 답했다딸이 어머니에게는 할 말 없냐고 물으니 참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하다고 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영화배우 신성일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청춘의 벗이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영남신문의 최신기사   [ 다른기사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