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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20/03/06  영남신문
노래 60년! 이미자(李美子)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李美子)19411030일 서울에서 아버지 이점성과 어머니 유상례 사이에서 2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미자가 어릴 적 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가 어려운 생활을 하여 형제들과 떨어져 외할머니댁에서 자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이미자는 문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텔레비전 노래자랑 프로그램인 KBS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위를 했으며, 당시 유명한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 1983년 작고)에게 스카우트되어 열아홉 순정(반야월/나화랑)으로 가수로 공식 데뷔했다.

 

데뷔 전부터 애절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주목받은 이미자는 1964동백아가씨를 발표해 35주 동안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받았다.

 

당시 스카라 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에서 방음 장치 다해놓고 얼음물에 발을 담가가며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불러 국내가요사상 최초로 25만 장이란 엄청난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집과 전화 그리고 자동차를 장만할 만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미디어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25만장의 음반 판매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국형 트로트가 완성되기 전이라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 당하기도 했다.

 

지금 듣기에는 별 차이를 못 느낄 수도 있으나, 당시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비슷했다. 하지만 동백아가씨는 장년층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가 있다.

 

이어 이미자는 1965년에 평생의 콤비가 되는 작곡가 박춘석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박춘석은 패티 김, 최양숙, 남진 등 당대 스타들을 발굴해 가수로 우뚝서게 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다.

 

두 사람이 뗄 수 없는 콤비로 손을 잡게 만든 노래는 1965년에 이미자가 발표한 흑산도 아가씨(정두수/박춘석)였다. 박춘석은 이미자의 천재적 가창력에 감탄했다.흑산도 아가씨에 이어 1966KBS 라디오 주제가 섬마을 선생님도 발표한지 불과 일주일만에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어 이미자는황포돗대〉〈울어라 열풍아〉〈여자의 일생〉〈황혼의 블루스〉〈흑산도 아가씨2004년까지 총 2,100여 곡에 달하는 곡을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 가요 사상 가장 많은 취입곡 기록이다. 이 밖에도 500여 장의 음반을 발표해 최다 음반 판매기록은 물론, 45년에 달하는 최장 기간 가수활동 기록 등 여러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이미자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다.

 

이미자는 1989년 가수 생활 30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고무신짝' 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 며 대관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고무신짝' 이라고 비하하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이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시장의 도움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득실 댈 것이라던 세종문화회관 측의 예상과 달리 당시 정재계를 비롯한 고위층 인물들이 관람하러 왔고, 특히 4개 야당 총재들이 부부동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오는 등 공연은 성황리를 이뤘다고 한다.

 

이 후 이미자가 트로트 가수로서 처음 세종문화회관의 관문을 넘으면서 남진이나 심수봉 같은 후배 가수들 역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자는 1995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과 함께 화관문화훈장을 받았고, 대한민국 가수왕 3, MBC 10대가수상 10회를 받았다. 2004년에는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우정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미자가 지금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수 이미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이러한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이었으며, 당시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미자의 노래는 당시 어렵고 고달팠던 우리민족의 한()을 달래주었다.

 

트로트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는 수많은 노래를 불러 전 국민을 울렸고,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슬픔을 녹여주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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