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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11  영남신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朴熙道)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하여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른 박희도(朴熙道)1934년 경남 창녕출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생도시절부터 박준병, 박세직과 함께 일명 쓰리박()을 형성하며 육사 12기의 선두주자로 성장했다.

 

19563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되어 한 기수 선배인 전두환과는 생도시절부터 깊은 친분을 쌓아온 사이로 전두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960년대 중반에 하나회에 가입했다.

 

그리고는 1975년 드디어 육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군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1976년 전두환 장군이 1공수여단장에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을 받게 되자 자신의 하나회 후배였던 박희도를 떠올리게 되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육사9)에게 간청을 하여 박희도 장군이 1공수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가 제1공수특전여단장에 부임한지 1년만인 1976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다.

 

전 세계가 경악한 도끼 만행 사건은 유엔군으로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유엔군 측 초소를 경비하던 미 육군 보니파스(G Bonifas) 대위와 바레트(T Barrett) 소위가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보고받고 군사적 응징을 즉각 검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분노했던 70년대 최대의 한반도 사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응징을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부대로 바로 1공수여단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합참의장이던 노재현 대장(육사 4)과 함참의 작전본부장인 유병현 중장(육사 5)으로 하여금 작전 지시를 내리고 이에 은밀히 1공수여단을 방문하여 박희도 여단장에게 자신의 지시를 실행하라고 지시를 하게 된다.

 

주요 핵심은 판문점 윗쪽에 설치된 북한의 불법초소 4개를 모두 부셔버리라는 것이었고, 이에 박희도 여단장은 64명의 정예요원을 선발하고 그중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에 임명하여 이들에게 모두 무장할 것을 지시하고 판문점으로 보낸다.

 

그리고 이들 특공대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미군과의 사전 협의에 문제가 있어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스틸웰 대장이 이에 분노하여 박희도 장군을 몰아세우게 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미군측의 압력에 견뎌낸 박희도 장군은 또 한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8년 사산 앞바다에서 지대지 미사일의 발사실험에 성공하고 이에 자극을 받은 북한은 무장 간첩을 파견하여 서산앞바다 일대의 정보를 캐오게 했는데, 이때 육군본부에서 이를 탐지하고 무장 간첩을 쫓았으나 어이없게도 박희도의 1공수여단 위수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임진강을 건너서 북한으로 귀환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이 박희도의 보직해임을 검토했으나, 그를 아끼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이 이세호 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겨우 여단장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박희도는 또다시 정병주 장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 하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박희도의 입장에서 정병주 장군은 세 번씩이나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또한 사실 박희도가 준장에 진급한 것도 정병주 장군이 진급심사에서 박희도를 준장으로 진급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줬기에 가능한 것 이었다.

 

하지만 1년 후 박희도는 197912.12 군사 반란에 참여함으로써 자기의 은인이자 상관인 정병주 당시 특전사 사령관을 배신한다. ,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세상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충성하는 그런 자였기에 정병주 장군에 대한 배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19791212, 1공수특전여단장(준장) 신분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해서 쿠데타의 1등 공신이 되었고,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전두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은인이자 직속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지시에 항명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불법적으로 점거하였다.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3.5공수여단 병력의 이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박희도는 근무지를 이탈하고 병력을 출동하여 서울로 진입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게 된다.

 

또한 숨어있던 국방장관 노재현도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대통령 재가를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박희도 준장의 은인이자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에 체포되어 진압군은 결국 무력화되고 전두환의 군사쿠데타는 성공을 한다.

 

박희도는 이 공로로, 그 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26기계화보병사단장에 부임하고, 그 이후 1년도 안되어 중장으로 진급하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정병주 장군의 부대인 특전사령관에 부임했다.

 

이때 박희도는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천리행군이라고 하는 훈련을 도입하게 된다.

 

하나회 12기 멤버였던 특전사령관 박희도, 보안사령관 박준병, 수경사령관 박세직은 이른바 '쓰리박'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희도는 12.12 군사반란 이전까지만 해도, 육사 12기 선두 주자인 박준병, 박세직보다 진급이 1년 늦었지만 박세직이 예편하고 박준병이 1984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차출되어 전역하면서 1985년 유일하게 남아있던 박희도는 그가 꿈에 그리던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박희도 참모총장은 2년 임기가 만료되었던 198712월에 예편 수순을 밟아야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임기가 1년 연장되었으며, 19886월 임기를 6개월 남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하여 경질되었다.

 

전역 이후에는 다른 하나회 인사들처럼 공직이나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두 차례 총선 출마를 시도하긴 했지만 14대 총선은 공천에 탈락했고, 다음은 김영삼 정부의 “12.12 쿠데타 단죄로 불발되었다.

 

그리고 1994년 문민정부 들어서 박희도는 12.12재평가 과정에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고 풀려나게 된다.

 

군인으로써의 박희도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강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던 병력들과 맞서면서 정당한 진압군을 제압하고 불법적으로 아군의 최고 사령부를 공격하였으니 결국은  불법적인 행동을 한 부정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12.12 군사쿠데타가 올바르게 진압되었다면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은 총살형에 처해졌어야 할 인물이었다.

 

하나회 멤버이기도 하며 5공 탄생에 주역을 맡은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면서 두터운 신뢰감을 보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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