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0.9.23 (수)
    
 http://www.ynamnews.co.kr/news/14121
발행일자: 2019/02/14  영남신문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

19791212 사태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張泰玩)1931년 경북 칠곡 석적면 출생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는 산남(山南)이다.

 

그는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1950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당시 육군종합학교는 고졸이상을 갑종으로 장교로 임관하고, 고졸이하의 중졸은 을종으로 분류하여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장태완은 6.25 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나 다름없었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하였으며,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교육참모부 차장 등을 거쳐 준장 계급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마침내 장태완은 19791116일자로 대한민국의 수도를 책임지는 운명의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한다.

 

갑종 출신인데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라갔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고 누가 보기에도 육사 출신 육군참모총장에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평이 많았다.

 

장태완 장군은 부하들 체력단련에 매우 신경을 썼다. 힘들고 빡센 훈련을 많이 시켰으나, 훈련 성적이 좋고 체력이 우수한 병사에게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둑한 포상들과 포상휴가, 자력표에 유리한 평점을 많이 줬다.

 

반대로 체력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엄한 벌을 내려 어떻게든 체력을 끌어올려냈다. 겨울철에는 소대 전원이 웃통을 벗고 뛰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태완 본인도 병사들과 함께 직접 웃통을 벗고 뛰었기 때문이다.

 

"인간 장태완"은 그 반대로 매우 자상했다. 장태완이 육군 소장인데도, 일개 병장의 풀어진 전투화 끈을 몸소 묶어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장태완이 부임한 이후, 휘하 병력에게 나오는 식단도 매우 좋아졌다. 쇠고기, 계란찜, 깻잎 무침등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이나 먹을 고급 반찬이 특식으로 많이 나왔다.

 

그만큼 장태완이 휘하 병력에게 돌아가는 식단을 눈여겨봤다는 얘기다. 게다가 종종 예고도 없이 불시에 병사 식당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급양관이 요령을 피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태완은 조금이라도 사병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이려고 매우 노력했다.

 

하지만 장태완 장군은 19791212일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이 벌인 하극상 역모에 당하고 만다.

 

1212 사태 당시 장태완은 수경사에 부임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신군부측의 반란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는 한편, 육본에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고, 휘하 전차중대를 기습적으로 보내 경복궁에 모여 있던 반란군 일당을 쓸어 보려고 했다.

 

그는 당시 쿠데타에 협력할 것을 종용하는 신군부에게 전화를 걸어 "! 이 반란군 놈의 XX들아. 너희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가서 네 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라며 소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장태완 장군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212는 이미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으며, 또한 부하들의 배신과 반란 등 진압작전을 위한 전화마저 도청되어 손쓸 수가 없었을 뿐더러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의 진압작전 중지 명령에 의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장태완 장군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신군부에 맞서다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두 달간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됐고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장태완 장군의 부친은 TV뉴스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곡기를 완전히 끊은 채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19804월 세상을 등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장태완 장군과 부인 이씨는 슬하에 11남을 뒀지만, 아들의 삶 역시 비참하게 끝났다. 1982년 낙동강변 야산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당시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아버지의 비운에 늘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들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미결 사건으로 종결됐다.

 

장태완 장군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애끊는 마음에 죽은 아들의 코와 입에 들어찬 얼음을 혀로 모두 녹여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은, 본인이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매우 슬퍼했다. 부친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전국을 유랑했고, 아들이 죽은 후에는 "성호는 내가 죽인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장태완은 슬하에 11녀를 두었는데 가끔 '하나라도 더 낳았으면' 하는 후회도 했다고 한다.

 

이후 장태완 장군은 1994년에 자유경선에서 재향군인회장에 당선되어 6년간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20003월 민주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으며, 같은 해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0726일에 숙환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불의에 맞서 군인다운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대한민국 군인 장태완 장군은 참 군인이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기사 출력  기사 메일전송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