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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06  영남신문
육군 보병 제20사단장 박준병(朴俊炳)

이등병에서 육군 대장까지 오른 박준병(朴俊炳) 대장은 1933년 충북 옥천군 출생으로 본관은 태안(太安)이며, 호는 청산(靑山)이다.

 

박준병은 6.25 전쟁 때인 1950915, 대전중 5(17) 때 피난지 경남 밀양에서 제3 육군병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6.25에 참전했다. 이때 신병 동기 가운데 안응모 일병이 뒤에 경찰에 입문하여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병장으로 진급한 그는 1952년 대구에 있던 육본에서 4년제 육사 2기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코자 했지만 학력미달이 문제가 됐다.

 

대전고 2년 수료증으로는 응시가 안돼 대대장 백창기 중령(서울대 의대 1회 졸업, 육군소장 예편)의 추천서로 111의 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박준병은 생도시절 군사학 4년간 우수상을 받고 19566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소위로 임관됐다.

 

이후 그는 베트남 전() 참전 중에 소령으로 진급하여 민사 심리전 대장으로 임명되어 고위 지휘관들 앞에서 민사 심리전에 관해 브리핑했더니 브리핑 잘 하는 장교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월남 근무를 마치고 19687월 귀국하여 ‘1.21사태뒤 북의 대남침투가 극성일 때 강원도 원통 12사단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무장 침투 적병들을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박준병은 하나회의 멤버로 육군사관학교를 12기로 졸업한 동기 박희도, 박세직과 '3(쓰리 박)'으로 불렸다. 박세직과 더불어 동기 중 선두 주자였다.

 

19798, 소장으로 진급하여 운명의 20사단장을 맡아 10.26 국변사태 이건영 사령관으로 부터 서울 출동준비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충돌시까지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의 연락은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2.12’사건 닷새 전, 연희동 전 사령관 댁에 초청되어 경복궁 30 경비단 장세동 단장 사무실 저녁약속을 지시받았다. 그날 가서 보니 정승화 총장 연행문제로 보안사와 수경사가 대립하고 있음을 알았다.

 

박준병 본인은 사전에 모임의 목적이 반란인지 모르고 갔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준병에게 20사단 출동을 요청했지만 박 장군은 19615.16 당시 이한림 장군의 입장을 상기하며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공수여단과 9사단을 동원하여 12.12 사건이 진행됐다.

 

경복궁 팀이 청와대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연행 청원 갔을 때도 박 장군은 빠졌다. 이 일로 나중에 청문회 증언대에 섰지만 사실규명이 분명하여 문제가 없었다.

 

훗날, 국방부와 육군본부 장악을 위한 전두환 병력 요청 동원은 거부한 덕에 12·12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박준병 장군이 20사단장 복귀 후 1980515일 육본으로 부터 광주 출동명령을 받았다. 21일 새벽 부대가 용산역을 출발하여 광주공단 입구에 이르러 민간 시위대에게 지휘용 지프 14대가 탈취되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또한 민간 시위대와 충돌사건 3차례가 있었지만 원만히 수습됐다. 이어 광주 시가지 정비와 외곽 농촌 일손 돕기 등으로 광주출동 임무를 마쳤다고 생전 회고했다.

 

그러나 19805.18 민주화운동 중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20사단을 지휘해 항쟁을 무참히 짓밟았다는 논란은 있다.

 

이후 박준병 장군은 1981년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2.12에서 공을 세운 박희도가 서서히 약진하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도 육사 12기의 최선두는 군사정권의 두 핵심 요직을 꿰찬 수도경비사령관 박세직과 국군보안사령관 박준병이었다.

 

하지만 박준병 장군과 경쟁하였던 박세직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2인자를 자칭했다는 구설수에 휘말려 격노한 전두환의 지시에 박세직은 아웃되고 12기 선두 주자는 박준병과 박희도가 남게 되었다.

 

박 장군은 보안사령관 시절, 권력기관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여러 가지 혁신조치로 보안사 내부에서는 인기가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사령부 건물 신축예산 100억원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반납하고 각종 위문금품도 전방부대로 이송했다.

 

반면에 군 전력증강 계획에 역점을 두어 방위산업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군 진급관련 3군 장교들의 인사기록을 재검토하여 전문성을 지닌 능력자들의 인사상 불이익을 없애도록 개선했다.

 

이후 박준병은 총선을 위해 정치권으로 차출되게 되고 12기의 참모총장은 박희도가 하게 된다. 전두환은 박준병을 대장으로 명예 진급시켜준다.

 

전역 1주일 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계급장을 달고 8477일 육군 20사단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박준병의 총선 전략 외에도 전두환은 박준병보다 무골인 박희도가 참모총장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자질은 차처하더라도 박희도는 전두환의 막대한 신임과 12.12에서 세운 공으로 이미 박준병을 앞서가기 시작해 먼저 대장에 진급했다.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새롭게 출발한 박준병은 1985년부터 제12, 13, 14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을 지냈다.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였으며 중선거구제인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한국당 이용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3대 국회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태우의 지시를 받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으로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접촉, 3당 합당을 성사시킨다.

 

14대 국회의원 재임 중 YS의 민주계가 박준병을 포함한 민정계에 압박을 강화하자 반발하여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다. 1996, 12·12 군사반란 중 반란중요임무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자 지역구를 물려주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무죄 선고 이후 정계에 복귀, 자민련 사무총장을 맡아서 1998721일 서초갑 재보궐 선거에 자민련-새정치국민회의 여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나 한나라당 박원홍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옛 지역구였던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상대후보에게 패배하자 완전하게 정계를 은퇴하였다.

 

본인은 하나회의 멤버가 아니라고 부인했고, 전두환도 법정에서 박준병은 하나회의 멤버가 아니라고 말한바 있지만 증언의 신빙성이 모호한만큼 여전히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박준병 육군대장은 2016년 7월 3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3세.

 

박준병 장군은 학도병에서 이병, 병장, 소위, 대장까지 3310개월의 군() 임무를 수행한 입지전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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