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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3/18  영남신문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蔡命新) 장군

1965
8월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그는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상황을 정면 돌파하여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하였고, 한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채명신은 19261127일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평안도에서 교편을 잡은 교사였으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청년시절 김일성, 김책과의 만남 이후에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월남하였고, 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지원하여 군문에 들어섰다.


19484월 사관학교(5)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에 임관한 그는 북한 게릴라 토벌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는 적 후방부대에 침투하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한군 수뇌부인 길원팔을 생포하는 등 무수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길원팔은 채명신의 끈질긴 전향 권유를 뿌리치고 김일성이 자기에게 준 권총으로 자결하는 것이 군인의 도리이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에게 권총을 내주었다. 자신을 공격하거나 도망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총을 준 것인데 그는 순순히 자결을 하였다. 시신을 땅에 묻어주고 부하들과 함께 "받들어 총"으로 예를 표한 뒤에, 그가 부탁한 아들을 남으로 데려와서 잘 길렀다.


채장군은 그 애를 자기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그는 나중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모 대학 교수로 있다고 한다. 는 적 일지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담대함을 보였다.

 

당시 참전했던 '백골병단'은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대한민국 군과 정부에 의해 어떠한 보상도 없었으며 심지어 군재입대까지 하게 된다. 채명신 장군은 자서전에서 이들에 대해 사후 대책이 없어 해결해주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써놓았다.

 

6.25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5510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4만여 명의 훈련병을 거느리고 있는 논산훈련소는 온갖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복마전 같은 곳이었다. 훈련소에 가보니 훈련병들이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었고, 그나마 부유층이나 권력층 자제들은 서류만 와 있고 사람은 없었다. 이것부터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고 서류상의 훈련병들에게 속달우편을 보내 언제까지 입소하라고 상류층 가정에 통지하여 입대를 명령했다.


그런데 경무대의 한 비서관이 달려와 아무개 훈련병은 경무대와 관련된 요원이니 휴가 처리해서 내보내 줘야 한다.”며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가 논리적으로 끝까지 따지고 대들자 경무대 비서관은 꼬리를 내리고 물러갔다. 이를 본 육군훈련소장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참모장으로 있을 때 훈련소의 고질적인 비리와 부패를 제거하였다.

 

19588월 준장으로 승진, 1군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하였다. 이후 제38보병사단장과 제5사단장을 역임했다. 채명신은 5사단장으로 있던 중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다.


19654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청와대로 소환을 명령 받게 되었다. 이때 월남전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명신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명분 없는 전쟁에 참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의 2개 사단을 철수 하겠다는 미국 측 일부 정객들의 압력을 받은 박정희는 그에게 월남전 파병을 종용한다.

 

1965년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주월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 중 그는 지하와 군내외부에 침투한 베트콩 프락치들의 암살 위협과 무좀, 풍토병 등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그는 베트남에서의 태권도 보급에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다. 1965년 월남태권도협회가 창설되어 월남 태권도의 현황을 조직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태권도의 저변을 한층 더 확대할 수 있었다.

 

채명신 장군은 휘하 장병들에게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주민의 협조가 없는 작전은 실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민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조금만 더 일찍 한국군이 투입되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하며 그는 미군들로부터 군신(軍神)으로 불렀고 채 장군을 세계 전사에 소개하였다.

 

196953일 특별군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귀국하였고, 그해 512일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72년 초 대통령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박정희는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보이고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줄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채명신은 신의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인사 불이익을 받고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게 된다.


197261일 제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전역하였다.

 

이후 그는 1972년 주스웨덴 대한민국 대사로 파견되어 1973년 주그리스 대사관 대사, 77년 주브라질 대사관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 단체와 한국 전쟁 참전 단체 활동과 강연 활동 등을 다니며 참전용사의 복지와 보상을 위해 애써오다 20131125일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지병인 담낭암으로 향년 88세에 별세했다.


유언으로 자신을 베트남전 참전 장군 묘역이 아닌 베트남전 참전 사병 묘역에 안장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립묘지 사병 묘역에 안장하기로 했다.

 

베트남 참전은 한국으로선 분명히 성공한 전쟁이었고 그 선두에 부국강병의 기치를 높이든 지장 채명신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항상 사병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였고 베풀 수 있는 정성을 다 하였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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