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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4/16  영남신문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장군

19506.25전쟁 때 1사단 사단장이었으며, 최후의 저지선 낙동강 전선에서 기사회생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은 장군이었다.

 

백선엽(白善燁)192011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백윤상(白潤相)과 어머니 방효열(方孝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주변에 의지할 친척이 없어 그의 어머니는 길쌈과 밭일, 누이들은 공장의 여직공으로 입사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해 1939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다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194112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후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소련군의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처벌과 지주들에 대한 재산 몰수에 반감을 품게 된 그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194512월에 월남하게 된다.

 

월남 후 194512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226일에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육군부위(중위)가 되었다. 그 뒤 같은 해 1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의 물자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군수품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군납업자와 내부에서 협조한 하사관과 장교들을 적발하고 분실률을 2-3%로 낮추게 된다. 물자 분실률을 50%대에서 10%대 미만으로 줄이게 되자, 미군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백선엽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조병옥의 건의로 미군정 하에서 국방부격인 통위부가 조직되자 그는 통위부로 대기발령 되었다가, 곧 통위부장 유동열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19484월 통위부 정보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여순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숙청하는 '숙군'과정에서 박정희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이후 19492월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김안일 방첩대 과장을 통해 박정희를 직접 면담한 후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현 군무원)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당시 정보에서 예산문제로 문관 월급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백선엽은 자신의 판공비 일부를 차출해 박정희의 월급으로 지불했다.


1953년 박정희를 장군으로 만들어준 것도 백선엽이었다. 경무대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아 제외하려 했으나 백선엽은 강행했다.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1950625일 아침 7시경, 서울에 있던 백선엽은 사단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전화를 받았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것이 백선엽이 받은 6.25 전쟁에 대한 제1보였다.

 

백선엽은 즉시 복귀해 1사단을 지휘했는데, 그의 사단 담당지역은 인민군의 주 공격로 위에 있어 T-34 전차 등 인민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음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차가 몰려오자 일부 병사들은 폭발물을 들고 달려들어 저지하는 투혼을 벌였는데, 이는 지시한 적도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사단장인 그도 숙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북한의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로 인해 퇴각을 하지만, 그의 부대는 퇴각중에도 백선엽의 지휘 하에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할 수 있었다.

 

이들의 교전으로 전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북한군이 서울 점령 때까지 그나마 3일의 시간적 여유를 벌었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낙동강을 넘어서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8월공세에 맞서 국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815일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되어 육박전이 펼쳐졌고 819일에는 미군 23연대가 뒤를 받쳤다.


그러나 820일 미군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백선엽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들도 저기서 싸우고 있지 않는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결국 821, 5시간 동안 모든 자원을 투입한 총력전이 펼쳐졌고, 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백선엽은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 이미 85일 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한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백선엽 이끄는 부대는 미국 1기병 사단, 24 보병 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한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육군 제2군단장을 거쳐 19527,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참모총장 재직 시 그는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 등을 추진하였다.

 

19531월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43개월의 장기간 동안 초대 1군사령관으로 야전군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19575,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스스로 용퇴를 결심, 1960531일 퇴역했다.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19607월 주중화민국대사로 부임하였다.

 

백선엽 장군은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기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은 6.25 전쟁 당시 바람 앞에 놓인 등잔불과도 같은 조국의 위기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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