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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06  영남신문
한국군(軍) 현대화의 아버지!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그는 마치 한국군()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국군(國軍)을 최대한 전력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은 1892319일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에서 태어나 1915년에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보병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특히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과정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그는 미 3군단장으로 승진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3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는 수적으로 우위인 공산군에 대항하기 위해 제 8군의 군사력 증강에 노력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8군은 한국군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으며 여기서 한 치의 땅도 양보 하지 않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다.


8군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나는 철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여기 왔다. 나와 함께 일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다" 고 했다. 중공군의 끝도 없는 인해전술 그리고 계속된 패배로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단순히 이 말 한마디로 미 8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끌어 올렸다. 마침내 충분한 장비와 훈련을 갖춘 8군 예하 부대가 상륙한 이후에는 확고한 전선을 구축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당시 3군단장이던 유재흥이 현리 전투에서 3군단 병력과 장비를 모두 잃고 패배하여 혼자 도주한 사실에 매우 격분했다. 유재홍은 19515월 중공군의 공세 상황에서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미군의 지원 포격도 있고 해볼 만 한 싸움이었는데 지휘관이 도망하여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다,


당시 밴 플리트 장군과의 전설적인 대화

 

밴 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에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에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 “유장군. 지휘관이 부대와 부하를 버리고 도주한다는 것이 말이 되오. 당신의 군단을 해체 하겠소.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

 

유재흥은 대표적인 친일파 군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일본 교육을 받았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이 시점부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어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유재흥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며, 최악의 패전 군인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중공군의 끝없는 인해전술에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 중공군을 막아냈다. 이른바 밴 플리트 포격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원래 관측된 목표에만 포격을 한다는 것이 포병의 교범이었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군이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인 물량 공세로 중공군의 인적 자원을 봉쇄해 버렸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195244.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인 지미 밴 플리트 중위가 임무 수행 도중 실종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195244일에 B-26폭격기로 압록강 주변을 폭격하러 출격했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시체는 발견되지도 못했고 이에 밴 플리트 장군의 참모들은 수색작전을 펼쳐서 시신이나마 찾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자신의 아들의 유해를 찾는 것이 다른 작전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


생판 처음 보는 나라를 위해 그것도 조국과 거리가 먼 이역만리에서 아들을 잃고 시신까지 찾지 못했지만 그 시신을 찾기 위해 적이 득실대는 압록강으로 부하들을 보내 헛되이 목숨과 바꿀 수 없으며 내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이의 아들들을 그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다.” 는 것이었다.

 

"어머니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저는 제 임무를 다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저와 함께 비행하는 동료들의 안전을 빌어주십시오"   -지미 밴플리트 중위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이 장기화할 것으로 판단해 한국군()의 전력화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시 쓸 만한 장교 부사관들은 대개 일본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터라 상당한 전략 전술을 구사했던 미국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시 한국군의 고질적인 약점들을 뜯어고치고 전력 강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특히 그는 한국군의 취약점인 장교들의 리더십 계발을 위해 한국군 장교들을 미 군사학교에 연수토록 조치하였다. 그는 장교를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 보병·포병 장교단 250명을 1차로 선발해 미국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에 유학 보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체계적인 군사 훈련 시스템 도입 및 적용, 포병 17개 대대 증편,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안 수립을 하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에는 미국에서도 이를 대단히 반대했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가난하고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 거의 무상으로 무기와 물자 장비를 지급해야할 판국이었으니까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입장 이었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대통령을 설득해 결국 20개 사단 증편을 허락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업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계속 건의했다. 당시 정황을 보아 앞으로는 중공업으로 가야 가난한 한국이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군의 현대화와 한국의 발전에 모든 것을 물심양면으로 쏟아 부운 장본인이었다.

1953년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뒤에도 수시로 한국을 찾았고 모금 활동을 통해 한국 육사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다. 그 후 한미재단(韓美財團) 총재에 피선되어 제주도 목장건설 등 한국 재건 및 문화사업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가난하고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나라의 전쟁에 참가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저는 한국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 (아들 지미의 실종 이후)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전사자 가족에게 보낸 편지 -


우리 주변 같으면 어떠했을까. 장군과 그 아들의 솔선수범은 우리 입장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밴 플리트 장군은 100번째 생일을 맞고 몇 달 후인 1992923일 숨을 거뒀다. 1995년 그를 기리는 밴 플리트상이 제정돼 한·미 관계에 기여한 인물이나 단체에 매년 수여 되고 있다. 한국군의 정예화에 기여해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했다.

 

평화를 위한 헌신과 용기!

더 많이 가졌기에 더 많이 나누겠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원칙을 준수하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페어플레이 정신!

 

백선엽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나와 함께 걸을 때면 늘 주머니를 뒤져 과자와 오렌지 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반드시 내게 나눠주면서 같이 먹자고 했다."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 준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8군 사령관!!!

그는 고통 없이 잠을 자듯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무너져가던 한 나라를 물심양면 재건하기 위해 애를 쓴 위대한 군인을 위한 신의 자비였을까.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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