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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16  영남신문
최은희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은막의 스타

만인의 여배우 최은희(본명 崔慶順)1926119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경기기예여자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최은희가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을 하자 극단적인 방법까지 서슴지 않았다. 최은희의 신발을 도끼로 못쓰게 만들었고, 방에 가두어서 외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배우가 기생처럼 천대받던 시절 지인의 권유로 극단 아랑을 찾아간 게 천직이 됐다. 그 시대엔 연극을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도 작용했다. 1940년대 당시 최고의 인기 극단인 아랑에 소속되어 있었던 여배우 문정복은, 최은희를 아랑의 연구생으로 입단하도록 도와주었다.

 

극단 대표 황 철은 최은희에게 말투가 느리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고 늘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최은희는 곧 주목받는 여배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아랑에서 연극배우로 성장했다. 그녀는 아랑에서 단역, 조역, 대역 등을 감당하면서 연기에 대한 열정과 훈련을 쌓아갔다.

 

최은희는 1947년 데뷔한 새로운 맹서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촬영기사 김학성을 만나 당시 21살 최은희는 어린나이에 얼떨결에 촬영기사 김학성과 1947년 동거를 했고, 당시 13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

 

그러다가 19506.25가 터지자 최은희는 북한군에 납치되어 청천강까지 끌여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다. 이로 인해 첫 남편 김학성과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고 그녀는 영화감독 신상옥과 재혼을 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한국 영화계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의 영화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영화 출연 편수는 한 해에 3~4편에 달했다. 최은희는 1950~70년대 한국 영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1961년에 발표된 세 편의 영화는 특히 주목된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가 이 작품들이다.

 

최은희는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여러 번 받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50년대 60년대를 통틀어 제일 인기를 많이 누렸고 한번 출연료가 300만원 정도로 제일 잘 나가는 배우였다. 당시 300만원의 가치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의 가치라니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는 안양예술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어느 날 홍콩에 안양예고와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홍콩을 찾았다가 바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남포항으로 납북됐다.

 

최은희는 김정일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김정일이 남포항으로 저를 마중을 나왔어요.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저는 악수할 기분이 아니어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30대의 김정일은 성격이 활달하고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했어요. 저에게는 잘 대해줘 불편 없이 지냈어요. 처음엔 날 죽이려나생각했지만 부드럽고 예의를 깍듯이 차려서 죽이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그녀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간 신상옥 감독도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었다.

 

김정일은 낙후된 북한영화를 국제적으로 키워보고 싶어 데려왔다. 앞으로 일을 좀 해달라고 했다. 김정일은 세계영화를 15000여편 소장할 정도로 영화광이었다. 한국작품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영화광 김정일의 후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등 북한과 동유럽권 국가들을 오가며 영화 제작 활동을 하였다.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늘 북한을 탈출하려다 드디어 1986313일 영화촬영차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하였다가 택시를 타고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납북된 지 9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이들은 한국대신 미국으로 망명 하였다. 당시 남한에 우글거리는 간첩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 부부에 50만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미국 CIA는 이들을 잘 보호해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 해주었다.

 

최은희의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아야 했고, 어두운 여건에서도 영화를 찍고 제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으며,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다시 장벽을 넘어야 했다. 배우로서 그녀의 이미지는 겉으로 보면 대단히 부드럽게 보인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혹은 성춘향의 다소곳한 이미지는 그녀의 인상을 더욱 그렇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는 부드러움만 간직한 배우가 아니다. 그녀의 부드러움 너머에는 꿈틀거리는 강함이 있다. 그 강함은 연극을 위한 의지이고, 두려움 없는 도전이고, 자유를 향한 열정이었다.


최은희는 병고에 시달리며 만년을 보내다가 201841692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무상하다. 영화배우 최은희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또한 한국영화발전에 공로가 지대하다. 만인의 여배우였던 최은희님을 그리며...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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