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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8/10/16  영남신문
장미희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은막의 스타

감성과 지성을 갖춘 영화배우 장미희는 1958127일 서울 출생으로 아버지 장경근, 어머니 최숙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유년시절에 장미정(張美貞)이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에는 축구 등의 운동을 좋아해 축구공으로 남자애의 발목을 맞혀 넘어뜨리기도 했다.

 

1972년에는 예술대회에 출전하여 춘향전으로 금상을 받았다. 원래 장미희는 초등학교 교사가 장래희망이었으나, 그녀 언니의 권유로 출전하여 받은 것이다.

 

장미희는 1975TBC(동양방송) 특채탤런트로 뽑혔다. 이듬해인 1976,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춘향' 역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데뷔하였다.

 

다음해 1977, 겨울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 수였다. 뒤이어 속 별들의 고향, 순악질 여사 등이 흥행하게 되면서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잇는 여배우 신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에서도 정윤희와 함께 출연한 청실홍실, 비바람 찬이슬, 찔레꽃 등이 성공하며 정윤희와 함께 미녀배우 순위에 올랐다. 당시 외모 면에서 정윤희와 유지인, 장미희 중 누가 더 예쁜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녀의 영화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배창호가 감독을 맡은 안성기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된다.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처녀 혹은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원숙미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는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에로물이 범람해 영화가 전체적으로 야해지다 보니 깊고 푸른 밤이나 적도의 꽃에서 정사장면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 깊고 푸른 밤의 성공은 장미희의 이미지 변신이 완벽하게 성공했음을 알렸고, 다른 트로이카의 일원인 유지인과 정윤희와는 달리 이후의 방송 활동에도 탄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장미희는 1976T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제12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1991년 제2회 춘사대상영화제 여우주연상, 1992년 제30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장미희는 젊은 시절부터 프로정신이 대단해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 장미희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이 크게 작용했다.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대체로 장미희에 대해서 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신인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은 건 물론이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배우를 배려했다.

 

또한 장미희는 배우 활동과 더불어 교육계로 진출하여 명지전문대학에서 교수로도 활동했다.

 

장미희는 60~70년대 트로이카인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뒤를 이어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배우이며,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아름다운 여배우였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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