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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20/03/10  영남신문
돌아와요 부산항! 조용필(趙容弼)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가왕(歌王) 조용필(趙容弼)1950321일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리에서 아버지 조경구씨와 어머니 김남숙씨 사이에서 34녀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임천이며,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적 조용필은 당시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조용필이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는 그의 형이 집에서 취미 삼아 기타를 조금 쳤는데 자연히 기타를 만지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후 그는 음악에 빠지면서 도서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가족들 몰래 음악학원에 나가기 시작하며 기타와 악보 그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가 공부를 하여 그 방향으로 나가기를 바랐는데 조용필이 기타를 만지고 음악을 듣고 하니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조용필이 만지는 기타를 부수고 다시는 음악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이에 조용필은 자신을 몰라주는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과 음악에 대한 욕망으로 고교 졸업 후 결국 집을 나가는 가출을 하게 된다.

 

당시 조용필의 회고.

그땐 집에서 워낙 반대하니까. 그땐 음악 하는 것 자체가 불량스러운 취급을 받았어요. 심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출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불쑥 집을 나왔죠.

 

악기를 사는 것도 금전적으로 힘들었지요. 돈 벌어서 전부 그쪽에다 쏟아부었으니까. 머리도 길고, 복장도 이상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요.” 그러나 가출은 방황과 좌절의 연속으로 어두운 생활뿐이었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졸라 약간의 돈을 마련해 동대문 근처에 허름한 월세방을 얻었다.

 

당시에는 말이 방이지 창고를 개조한 형편없는 곳이었다. 여기서 친구 3명과 함께 기거하며 피나는 연습 끝에 드디어 애트킨즈라는 그룹을 결성했지만 좀처럼 쉽게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을 지내다 팀을 해체시키느냐의 갈림길에서 택한 것이 서울에는 기라성 같은 그룹이 많아 명함을 내밀 수 없으니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경기도 문산의 법원리 용주골에서 기지촌 그룹으로 첫 발을 내 딛으며 애트킨즈는 주로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연주했다.

 

8군이라 하면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8군 무대는 60~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일 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조용필은 점차 그곳 생활에 회의를 느껴 1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패배감과 좌절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거리에서 대학 뺏지를 단 동창을 만나는 고통,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초조감과 소외감에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이때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를 하시던 그의 아버지가 하고픈 일을 마음대로 해보라는 말을 하자 조용필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다시 밤무대에서 연주와 노래를 시작해 화이브 휭거스에 가담하게 된다.

 

화이브 휭거스에서 그는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템테이션스 등의 블랙뮤직에 심취했다.

 

원래 조용필은 그룹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였는데, 노래하던 친구가 갑자기 군대를 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조용필 회고.

밤새도록 외우고, 연습하고 대역으로 시작했다고 봐야죠. 어느 날 한 미군 병사가 '내일이 내 생일인데 (미국 블루스 가수)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을 불러달라'면서 '백판'을 갖다 줬죠.

 

이튿날 그 노래를 불러주니 너무 좋아하면서 맥주 몇 박스를 주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김트리오, 그룹 25, 조용필과그림자 등의 밴드를 하면서도 제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조용필의 트레이드 마크적인 소울풍의 호소력과 강한 휠링은 이때에 다듬어진 것이다.

 

또한 조용필이 본격적인 록 뮤직으로 전환한 것은 1970, 재즈 드러머 김대환과 함께 만든 김 트리오에서 그는 록 음악을 익혔고 이때 작곡하는 법을 익혔다.

 

1972년에는 그룹 25시로 옮겨 싱어로써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그러던 1973년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입대해 3주간 훈련을 받고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조용필은 군 복무를 마치고 음악에 발을 디딘지 6년만인 1974년 경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조용필은 유재학(당시 베이스담당으로 현재 레코드제작자)과 함께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만들어 1974년 주간선데이 서울이 주최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때 레코드업자가 음반을 취입하자고 해서 조용필은 신이나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준비를 서둘렀지만 레코드 제작자는 돈을 챙겨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조용필은 1974<사랑의 자장가>를 타이틀곡으로 앨범을 냈지만 실패작으로 끝나고 만다.

 

연이은 실패로 실의에 빠진 조용필은 26세가 되던 1975년에 킹 프로덕션에 사정을 해 다른 가수와 함께 묶은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고는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항도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조용필이 처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년 남짓 인기를 누리던 그에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방송활동이 금지되었다.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이 찍혀 다시 눈물을 흘리며 무대를 떠나 방황과 울분 속에 37개월을 보내야 했다.

 

이후 조용필은 1979126일 해금과 함께 새 음반을 내며 그룹 위대한 탄생을 조직했다.

 

그 무렵 동아 방송의 드라마 주제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인 배명숙의 노랫말을 건네받아 직접 작곡까지 한 <창밖의 여자>를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당시 100만장을 판매해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창밖의 여자>라는 이곡은 조용필의 재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린 드럼을 사용한 댄스리듬풍의 <단발머리>가 연달아 히트하면서 그는 가요계에서 부동의 4번 타자로 안착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년말 그는 KBS, MBC, TBC의 방송가요대상에서 작곡상, 인기 가요상, 인기 가수상 등 모든 부분을 휩쓰는 대기록을 세우며 1980년을 생애 최고의 해로 장식했다.

 

19817,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카네기홀 무대에서 노래했고, 1982년에는 서울, 부산, 대구 등지를 돌며 독립기념관 성금모금 공연을 가져 1억원을 모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웃나라 일본 땅에서 조용필의 붐이 일기 시작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물론 <미워 미워 미워>등이 인기를 얻었다.

 

1982년 이후 일본 가요계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1980년대 한국 가수들의 일본 진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에서 공연을 했다.

 

1983NHK홀 및 5개 도시에서 성대한 콘서트를 가지면서 재일동포들에게 한국 가수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국제적인 가수로 발돋움과 함께 현지 매스컴으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조용필은 1984년 국회의원 박 찬씨의 딸 박지숙씨와 결혼을 했지만 4년 만에 전격 이혼을 했다. 당시 조용필은 재산을 부인에게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깔끔한 모습을 보여줬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고추잠자리·친구여·허공·등의 곡이 연이어 인기를 얻으면서 198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가요 가수로 자리 잡았다.

 

또한 1980년대 방송국 10대 가수에 선정되어 매년 가수왕에 선정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였다.

 

이후 조용필은 더욱 음악에 매진하기 위해 가요 순위에 매달리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1994년에는 로비스트 출신 안진현과 재혼을 했는데,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고 내조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 후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에 사망을 했고, 조용필이 장례를 치루는 동안 간간히 오열을 하는 모습을 보여 보는 이의 가슴을 안타깝게 했다.

 

가왕 조용필의 히트곡은 너무나 많다.

<킬리만자로의 표현>, <바람이 전하는 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모나리자>, <아하 그렇지>, <추억속의 재회>,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86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불꽃>을 불렀으며 ‘88 서울올림픽을 찬양하는<서울 서울 서울>을 불렀다.

 

또 다량의 자작곡을 쓰면서 록과 클래식, 록과 국악 등의 융합을 시도했고 민요와 동요까지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았다.

 

기타로 작곡하고 늘 연필과 지우개로 작사하면서 사운드 디자인과 노랫말 끝음절 발음 하나까지 고심하고, 소리내기에 최적화한 체중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자기 관리는 남달랐다.

 

생명력의 비결은 단연 음악이었다. 그는 록에 판소리('자존심')를 버무리고 록에 뮤지컬과 오페라에 대한 애정('태양의 눈', '도시의 오페라')을 쏟아내고 민요('한오백년', '간양록)와 디스코('단발머리'), '펑크'('못찾겠다 꾀꼬리') 등을 들려주며 장르에 갇히지 않았다.

 

조용필의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2011415일엔 그가 공연 중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했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용필은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 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 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 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이전 세대 이미자, 패티김, 나훈아, 남진, 동시대인 80년대 전영록, 김수철, 이용, 이선희, 조용필 이후 등장한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조용필은 연예인중에서 기부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운영중인 YPC 프로덕션은 주주 배당금대신 기부를 하는데 연평균 기부금액만 3억원이 넘는다.

 

또한 조용필 아내 고() 안진현씨의 유산 24억을 심장병 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 조용필 장학 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원씩 기부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콘서트 수익금도 기부를 하는데 조용필이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돈으로 다 환산하지 못한다.

 

조용필은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쯤 조용필이 대한민국 연예인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 때 조용필 아버지가 언론사와 인터뷰 중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 양반이 함 알아봐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조사를 해 본 후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조용필은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던 것이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수퍼스타였다.

 

조용필은 특히 한결같은 겸손함과 스스로에 유독 엄격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조용필이 집을 샀다, 주식을 얼마 가지고 있다.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가왕 조용필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만큼 대중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현재 조용필은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역사, 전설, 가왕 (歌王), 국민가수 등으로 불리며 한국 대중 음악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용필은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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