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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20/03/02  영남신문
피리 부는 사나이! 송창식(宋昌植)

시를 노래하는 천재 뮤지션 송창식(宋昌植)1947년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서 출생 했으며, 본관은 진천이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하고, 이후 어머니도 행방불명된 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송창식의 회고.

“6·25 때 내가 네 살이었는데 아버지가 군대에 가서 죽었죠. 어머니는 나를 잠시 맡겨놓고 돈 벌러 간다고 나가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어요. 나는 친척집을 떠돌았죠.

 

밥이 전부인 어린 시절이었어요. 하룻밤 잠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서 친구 집이 있는 부천까지 눈 쌓인 길을 걸어갈 때도 있었어요. 버스비가 없어서였죠. 고등학교도 자퇴해야 했어요.

 

서울역 앞에서 두 달 동안 노숙자 생활 비슷하게 산 적도 있구요. 그렇게 하다가 작은 무대가 있는 서울의 한 음악 감상실에 가게 된 거죠. '쎄시봉'이었죠.

 

거기서 일해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밤이면 의자를 붙여 잠자리를 만들고 피아노 덮개를 이불 삼아 잤어요. 그리고 거기서 가수가 됐죠.”

 

송창식은 인천신흥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수석입학 하였으나, 가정형편상 1년을 다닌 후 중퇴하였다.

 

송창식이 서울예술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주와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또한 성악가가 되려고 했었다.

 

애초에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꾸는 클래식 전공자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중도 포기했다.

 

서류상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한다.

 

송창식의 동창인 금난새는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송창식이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송창식은 고교동창들이 진학한 대학교에 드나들면서 친구들한테 밥을 얻어먹었고,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불렀다.

 

당시 송창식의 친구들은 그가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방송인 이상벽의 회고.

"대학교 잔디밭 앞에서 많은 학생들이 기타를 쳤다. 그중에 송창식 씨도 있었는데 내가 쎄시봉으로 데리고 간 거다. 데리고 간 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세시봉 입봉과 관련해 송창식은 특히 이상벽을 거론했다. 송창식은 "이상벽이 쎄시봉으로 자신을 데려간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생활적으로도 터닝포인트인데 노래로서도 터닝포인트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팝 음악을 싫어했다. 조영남을 만난 것도 터닝포인트였다"고 말했다.

 

이후 송창식은 세시봉 주인의 권유로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송창식은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이듬해 1968하얀 손수건이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당시 송창식은 보컬 뿐 아니라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쎄시봉 중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이고 전문가 중에서도 보컬보다 기타 실력을 더욱 부각해서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1970년에는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그리고 1973년 군대 입대했다가 1974년 의가사 제대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마침내 송창식은 1974년에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에는 왜 불러라는 곡으로 대박을 터뜨려 가요부문의 여러 가지 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했다. 1978년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송창식은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다. 수많은 히트곡과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맑고도 힘있는 가창력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특유의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다시 말해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기인, 괴짜, 천재, 도사 등등 그를 가리키는 과장된 별명은 많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자극적인 별명들이 무색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음악인이다.

 

그에게 왜 평생 한복을 입고 노래하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외국에 처음으로 나갔을 때였어요. 양복을 맞춰 입고 외국가수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갔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제일 촌티가 나고 못나 보였어요.

 

백인들은 허름한 양복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그 다음번 외국에 나갈 때 한복을 입고 나갔죠. 그랬더니 내가 최고가 된 기분이었어요.”

 

개량 한복이 100벌은 넘는다고 한다.

 

송창식은 지금도 기타 연습은 매일 해야 한다고 했다. 45분 정도 기타를 쳐야 한다고 하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연습을 하지 않으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노래와 연습량은 완전히 정비례해요. 그러니까 천재적인 음악가다, 이런 표현은 인정하기 어려워요. 매일 놓는 사람과 안 놓는 사람은 천양지차. 부단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습량이 많으면 확실히 노래를 잘할 수 있어요. 연습 없이 재주만 있으면 언젠가는 고꾸라지죠.”

 

송창식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어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쓸만큼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라 그 시절 돈을 꿔가고 보증을 서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도 없다고 하며 지금도 그들과 웃으며 만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심지어 거지조차도 못 되었다. 그는 거지 굴에 갔다가 매를 맞고 쫓겨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거지도 자신들끼리 뭉쳐서 만든 사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거기에도 못 끼었다는 것이다.

 

송창식의 회고.

견딘 게 많았어요. 너무 춥고 배고팠으니까. 그런데 그걸 언급할 수 없는 게, 견딘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추우니까 , 추워. 배고파했던 적은 있었지만 죽겠네,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습관적으로 견뎠죠. 그래서 나에게 견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희열도 없죠. 견딘 게 아니니까. 그냥 인생 살면서 넘어간 거니까.”

 

송창식은 지금까지 가수 활동을 하면서 그 흔한 스캔들 없이 좋은 노래, 좋은 음악을 대중들에게 꾸준히 들려주고 있는 인물이다. 음악적 재능이 타고났고, 오직 대중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만을 노력한 송창식.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기는 내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 것이지. 사람들이 최고 인기가수를 만드는 거지, 가수가 잘나서 최고 인기가수가 되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뿐이죠.

 

인기는 계속 내려가요. 그리고 인기는 공부가 안 돼요. 공부는 습득해야 가능한 일인데 인기를 공부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인가?“

 

그는 요즘에는 자신만의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세시봉에서 활동했던 동료들과 자주 공연을 펼치고 있다.

 

송창식은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으로 득도한 천재이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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