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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20/03/03  영남신문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羅勳兒)

향수를 자극하는 애절한 노래로 수많은 히트곡을 낸 가수 나훈아(羅勳兒)1947211일 부산광역시 동구에서 아버지 최영석씨와 어머니 홍성염 여사와의 2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최홍기(崔弘基)이며, 본관은 해주 최씨이다.

 

나훈아의 아버지는 배를 타는 마도로스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무역선을 탔으며, 어린 시절 나훈아는 아버지 덕분에 아주 유복하게 자랐다.

 

나훈아는 부산에서 초량 초등학교와 대동중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의 나훈아는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으며, 그의 지인들은 나훈아가 악기를 다루는데 능숙하고 그 중에서도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밝혔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서울로 가는 원서를 써 준다고 했는데 나훈아는 반에서 2등을 해 그의 형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꿈에도 그리던 서라벌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예술을 가르치는 서라벌예고에서 나훈아는 클래식 성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나훈아가 공부에 소질이 있어 판검사나 의사가 돼라고 했다.

 

그런데 나훈아가 느닷없이 노래를 한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나훈아는 1965년 고교 2학년 때 친구와 함께 학교 근처에 있는 작곡가 심형섭씨가 운영하고 있던 음악학원을 자주 놀러 가곤 했다. 거기서 나훈아는 자주 노래를 불렀는데 작곡가 심형섭씨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당시 심형섭씨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하고 친분이 있었는데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노래를 너무 잘한다. 한번 와서 보라고 말했다.

며칠 후 손진석 사장이 직접 와서 나훈아의 노래를 들어보니 너무 잘 불러 손사장은 즉석에서 취입하자고 했다.

 

당시 LP판 내는데 6만원 정도 들었는데 그때 국민주택이 20만원 할 때니까 굉장히 많은 돈이다.

 

마침내 나훈아는 아버지 몰래 취입을 하게 된다. ‘천리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등을 포함해서 네 곡을 받았는데 연습도 거의 하지 않고 불렀다.

 

당시 곡을 취입하자면 오랜 연습을 하고 취입해야 했지만 나훈아는 타고난 목소리와 서라벌예고에서의 발성연습으로 한 번 부르고 바로 취입을 했다.

 

노래가 히트를 치자 50만원 이고 100만원 이고 돈을 뭉텅이로 받았다. 또한 집에서도 몰랐다. 가수 이름이 나훈아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자 나훈아도 오아시스 레코드사도 그야말로 살판이 난 것이었다. 사실 그때 오아시스 레코드사는 빚에 넘어갈 판이었는데 나훈아의 히트로 빚을 다 갚고 벌떡 일어서게 된 것이었다.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훈아는 1968년에 발표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시작으로 가지마오’ ‘고향역물레방아 도는데‘ ’애정이 꽃피던 시절등을 크게 히트시켰다.

 

1970년대에는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서로 경쟁을 벌여 보통 남진 아니면 나훈아가 가수왕상을 수상하였다.

 

나훈아는 남진과 함께 경쟁하면서 그 시기에 침체된 대중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어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1970년대는 나훈아가 주요 히트곡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남진이 발표하는 노래와 동시에 인기를 얻게 되자 치열한 경합이 펼쳐지기도 했다.

 

전성기를 한창 누비고 있었던 나훈아는 1972년에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하던 중 한 남자에게 병 파편으로 피습을 당해 몇 개월을 입원하였다. 이 같은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믿고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사실을 부인하면서 루머는 일단락되었다.

 

이후 나훈아는 건강을 회복한 뒤 1973년 비밀리에 공군에 입대하여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1976년에 나훈아는 전역한 후 얼마되지 않아 영화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을 발표하며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이혼 당시 수천만 원의 돈을 건넸는데 "남자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대인배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이기도 하다.

 

1980년 초반 나훈아는 정수경 씨와 혼인하여 가정생활을 하였고. 대표적으로 '사랑' 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그 후 87, 88, 89년도 무시로, 갈무리 등을 발표하며 히트를 쳤고 방송사에 얼굴을 가끔씩 비췄다.

 

나훈아는 1980년대 후반에는 방송에 잘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나훈아의 공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방송에서 나훈아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홍보와 마케팅에 집중하는 현대 가수들은 위험할 수도 있는 은둔 활동이라는 일종의 희소 가치는 그의 공연에 관객을 몰려들게 했고 그의 존재감은 전설로 상승했다.

 

나훈아는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데,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는다.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세계 최다임을 스스로 공인할 정도이며,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까지 전국을 뜨겁게 달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은 전 세대와 전 계층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90년대 이후의 라이벌들은 모두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대상이었던 데 반해, 남진과 나훈아의 격돌에는 국민 모두가 참여했다. 할아버지, 학생들, 지성인들, 농부와 상인들까지 남진인가 나훈아인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남진과 나훈아는 모든 것이 대조적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외모의 남진은 당대 영화배우들도 부러워한 얼짱 꽃미남이었고, 나훈아는 소도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남성적이었고 서민 풍모에 믿음직한 느낌을 주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지만 외모의 영향으로 남진은 대체로 젊은 여성 팬이 많았고, 나훈아는 어른과 남성들이 좋아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출신지는 공교롭게도 당시 새 정치를 표방한 야권의 젊은 기수이자 정치적 맞수인 김대중과 김영삼의 고향과도 일치했다.

 

지역감정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 그만큼 두 가수는 라이벌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조건이었다.

 

나훈아는 대표곡 물레방아 도는데를 비롯해 고향역’, ‘너와 나의 고향’, ‘머나먼 고향’, ‘녹슬은 기찻길등 향수를 자극하는 애절한 노래가 많았다. 무대의상도 수수한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두 맞수의 노래는 서로 다른 눈으로 같은 시대를 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운동으로 개발도상국 진입을 위해 전 국민이 건설과 수출의 깃발을 높이 들던 때였다.

 

가난해도 노력하면 반드시 도약할 수 있다는 번영의 꿈을 품었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는 그에 상응하는 후유증을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땅을 버리고 도시일터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가요는 결국 서민을 위한 위로의 장 아닌가. 주로 농촌을 떠난 사람들의 비통함을 다룬 나훈아의 노래는 이면의 아픔을 담아냈다.

 

나훈아는 고향의 아픔을 대변했다. 이것이 당시 우리 국민들의 정서였다.

 

나훈아는 전성기에 그치지 않고, 장기간 끊이지 않는 활동을 계속하여 최근까지 히트곡을 내고 있다. 지금도 공연을 보면 영향력이 상당하다. 수퍼스타 아이돌 가수보다 훨씬 대단한 정도이다.

 

나훈아는 이렇게 말했다.

40년 노래한 저로서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제 공연을 구경왔을 때 기대를 하게 만든 건 저이기 때문에 오신 분들과 무언의 약속이죠. 그래서 절대 온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게 공연하는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두 번째,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이란 말은 우리처럼 긴 세월을 노래하면 노래를 쉽게 잘하는 법을 압니다. 처음에는 안 그러다 세월 가면 박자를 늘렸다 줄였다 하죠. 이걸 오시는 분들이 다 안다는 겁니다.

 

무대에서 거짓말 하지 말고 노래해야 하고 무대 전체를 거짓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땀이 나게 돼 있습니다. 무대에서 땀을 댓 바가지를 흘리더라도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건 하자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꿈입니다. 저희는 꿈을 파는 사람입니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몇 억씩 하는 조명이 수십 대가 달려있습니다. 무대 출연진 누구나 보통 거리에선 입지 못할 멋진 옷을 입습니다.

 

막이 떨어지는 순간부터는 그 무대는 꿈이어야 합니다. 두 시간 이상을 혼자서 끌어가기엔 이 꿈이 없으면 힘듭니다. 저는 연습, 무대 감독, 출연, 세 가지를 꼭 합니다. 그래서 꿈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매년 공연을 똑같이 해본 적이 없습니다. 바꾸려면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고 사람들이 보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정도의 무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꿈이 필요합니다. 제가 꿈을 팔려면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꿈을 어디서 충족하느냐, 꿈 얘기는 중요한 얘기입니다. 제가 지금껏 노래해 오면서 한 5~6년 전부터 꿈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힘들기 시작했습니다. 꿈이 고갈된 느낌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갖고 있었습니다.

 

나훈아가 처음 가수로 데뷔하여 부른 노래가 히트를 치자 나훈아가 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자 오아시스 레코드 손사장이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해서 부산 집을 찾았다.

 

당시 오아시스 사장은 나훈아 집이 못사는 줄 알고 쌀 한 가마에다 돈 50만원을 넣은 봉투를 들고 갔다.

 

나훈아는 부모님 몰래 가수가 되었지만 인기가수가 되어 이만하면 아버지도 허락 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시 나훈아의 아버지는 손사장이 가지고 간 쌀과 돈 봉투를 집어 던지며 난리를 치고 말았다.

 

또한 나훈아도 그 길로 강제로 병원에 입원 시켜버렸다. 다시는 가수를 못하도록... 하지만 그때 나훈아는 다행히 입원하기를 잘했다. 거기서 폐가 안 좋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서 완쾌된 것이다.

 

아버지의 강제 입원이 결국은 나훈아의 병을 고치는 우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나훈아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나훈아를 용서하지 않았다. 나훈아는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울고 온다고 한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이 자주 초대를 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연회에 단 1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보통 가수들이 그런 연회에서 3곡 정도를 부르고 나서 3000만원 가량의 돈을 받는다는 것인데, 나훈아는 실제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제안을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나훈아는 말했다.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수퍼스타가 됩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면 그 사람은 수퍼스타가 아닙니다. 그냥 스타인 거죠.

 

싫어하는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겁니다.

 

가수들 중에 학벌 좋고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이 쇼하면 손님 안 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주 점잖고, 교양 있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가수보다는 교수 같잖아요.

 

가수는 일반 대중들과 함께 어울리며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공연을 보고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자랑을 하게 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최고로 비싼 입장료를 내고 왔는데, 내가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건 꿈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합니다.“

 

나훈아는 사회에서 날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사회에 할 일을 하고 있고, 나중에 사회에 주고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허연 턱수염,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 짙은 눈썹의 트로트 황제나훈아는 대중들에게 을 심어준 가수였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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