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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20/03/03  영남신문
한국의 엘비스프레슬리! 남진(南珍)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은 70년대의 슈퍼스타 남진(南珍)1945927일 전남 목포에서 아버지 김문옥과 어머니 장기순 사이에서 3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남진(金南鎭)이며, 목포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김문옥이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국회의원을 지내 어린 시절 남진은 목포 최고의 부잣집으로 불릴 만큼 꽤 부유하게 자랐다.

 

당시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 조병옥 등이 호남 지역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김대중 또한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남진은 부유한 집안의 출생이다 보니 자연히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했다고 한다중학교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불렀고 배우의 꿈을 가지고 서울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평소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을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데뷔하였다.

 

하지만 연극영화과 진학이후 영화배우 지망과 노래를 불러 음반을 냈지만 실패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남진의 두 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 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다.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 라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노래 숫자는 채워야 했기에 남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맨 끝에 집어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대 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남진은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렸기에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를 불러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 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 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1967년 장일호 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한창 인기를 얻었던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71년 전역 후 마음이 고와야지를 발표하며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72년에는 님과 함께를 발표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1970년대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서로 호남과 영남 출신의 가수로서 지역 사이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박진감 넘치고 활발한 성격의 남진과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훈아의 차이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1970년대의 가요계를 이끌었다.

 

이어 남진은 3년 연속 가수상을 타며 슈퍼스타로서의 자리매김을 학고히 했다.

 

또한 남진은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을 발표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남진 부부는 가정사에 연루되어 결국 37개월만인 197939일에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 후 남진이 힘든 시기 가수 김세레나가 소개를 해서 지금의 부인인 강정연을 만나 슬하에 13녀를 두고 있다.

 

1970년대 당시 남진 ·나훈아의 라이벌은 그렇게 긴장감 도는 무서운 신경전은 없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라이벌전이 한창일 당시 직장과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집안 식구들마저도 남진 편, 나훈아 편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도 어른으로부터 넌 남진이냐, 나훈아냐?”라는 선택을 강요받았을 정도였으니까. 과장하면 남진과 나훈아, 네 편 내 편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난 듯했다. 당시 연예의 흐름을 주도한 주간지들은 온통 두 가수를 비교하는 특집기사로 도배되었다.

 

남진 ·나훈아가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주일 시간차를 두고 공연을 했을 때 공교롭게 이 두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한 바 있는 정훈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경험한 바로 두 가수의 세는 우열을 따질 수 없을 만큼 팽팽했다. 객석은 완전 매진이었다. 공연장의 아우성과 환호 때문에 여자로서 무대 서기가 겁이 났다.”

 

맞수답게 두 가수의 노래는 접근법과 색깔이 달랐다. 당시 남진은 젊은 초원’, ‘목화아가씨’, ‘그대여 변치마오’,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그리고 결정타인 1972님과 함께처럼 대체로 미드템포의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

 

남진 ·나훈아의 라이벌전은 당사자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둘은 당시 어려운 트로트의 찬란한 전성기를 일궈 냈다.

 

하늘을 찌를 듯 한 끝없는 인기몰이가 영원할 것 같은 남진과 나훈아도 결혼과 동시에 자연히 방송 출연이 줄어들었고, 마침내 조용필의 등장으로 점차 가요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남진은 과거 1989년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어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남진이 데뷔할 당시에는 시대상으로 정부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왜색 가요라고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가 발족되어 방송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의 등장으로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불러 일으키면서 트로트 말고도 다양한 장르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남진은 21세기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도 가수로서 쉬지 않고 각 지방 공연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곧잘 매진이 되고 있다.

 

남진은 대한가수협회의 초대 협회장을 역임했으며, 나이가 75세인 2019JTBC에서 방송가요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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