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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2/04  영남신문
3군단장 유재흥(劉載興)

6.25 한국전쟁에서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는 현리전투의 책임자인 3군단장 유재흥(劉載興) 장군은 1921년 일본 나고야 출생으로 5살 때 귀국했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그의 아버지 유승렬은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군 대좌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유재흥은 1941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55기로 졸업, 1945년 종전 당시 대위까지 진급했다.

 

이후 유재흥은 194512월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 다음해 1월에 졸업하면서 구 일본군의 계급을 인정받아 남조선 국방경비대 정위(대위)로 임관했다.

 

이 시기에는 군대 체계가 거의 잡히지 않아 유재흥의 진급은 매우 빨랐으며, 28살인 1948년에 대령으로서 여단장과 사단장을 역임할 만큼 대한민국 국군의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어 그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하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제주도에 부임하여 유화책을 펴서 공산당 세력에 우호적인 주민들의 귀순을 유도, 생지옥이 펼쳐진 제주를 수습하고 2만 명의 제주도민 목숨을 구한 공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유화책에 대한 평가가 미국 군사 고문단에게도 나왔고, 당시 제주도 도지사가 유재흥 대령이 사람이 좋은데, 사람 좋은 유재흥 대령이 떠날 경우 포악한 다른 대령이 다시 제주도 사령관이 되면 큰일난다고 한 증언이 엄연히 남아 있다.

 

유재흥은 19506.25 전쟁 발발 직전의 돌연한 인사이동 과정에서 의정부 방면을 담당하는 7사단장이 되어 의정부 방어전에 참가하게 된다.

 

문제는 해당 인사이동이 한국군 10대 의혹이라고 불리는 6.25 전쟁 당시의 열 가지 의문사항 중 하나로, 6.25 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갑자기 서로 자리를 바꿈으로서 현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이했다는 의혹일 정도라서 유재흥도 그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흥의 제7보병사단은 의정부 방어전에서 패배했다. 7사단의 병력은 6.25 개전 직전 내려진 명령에 따라 후방으로 배치된 1개 연대는 이미 모두 새로운 주둔지로 이동해서 유재흥의 손에서 벗어난 반면, 새로 올 연대는 아직 기존 주둔지에서 출발도 못해서 결국 개전 당시 병력이 적었던 탓에 북한군의 105탱크여단 등의 주공격을 막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병력도 안되는 사단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막으라고 한 참모총장 채병덕의 무리한 명령인 탓도 있으니 전선붕괴는 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육군 제7사단은 붕괴 궤멸은 서울이 함락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 후 19507월 경상북도 함창에서 육군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육군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패전한 장수가 주요 보직을 맡게 된 것은 6.25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과 또한 국군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공산주의 경력으로 군()에서 강제 전역당한 박정희에게 복직을 시켜 줬을까?

 

7보병사단장으로 전투에 패하고도 제2군단장으로 임명된 유재흥은 공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전멸되어 해체케 하는 어이상실을 기록하게 한다.

 

창군 지휘관에 임명된 자신의 실수로 해체시켜버린 것이다. , 2군단의 초대 지휘관이자 마지막 지휘관이 되어버리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유재흥은 거듭된 패전의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군()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타고난 관운(官運)으로 19513월에 육군 제3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3군단을 이끌었던 유재흥은 현리 전투에서도 지휘관인 자신이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쳐 많은 국군 병사들이 몰살당하여 제3군단을 해체케 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이러한 것은 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의 무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여기서 6.25 전쟁 당시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는 현리전투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현리전투는 1951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당시 강원도 인제 현리지구 근방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516일 새벽에 중공군이 밀물 듯이 몰려오자 유재흥은 군단전체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517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유로 급히 경비행기를 타고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해버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던 병력들도 갑자기 30연대 병력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현리에 있던 병력이 전부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그 상태론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두 사람이 슬슬 도망치기 시작하더니 현리에 있던 전 인원이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현리에 있던 한국 육군 전 병력은 병사부터 장군까지 한순간에 부대 체계고 뭐고 없는 채로 분해되어 산 속으로 도망치면서 수만 명의 낙오병으로 전락했다.

 

이때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걸 막고자 미 공군은 현리 일대에서 3군단 장비를 폭격하는 어이없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조창호 육군 포병소위(귀환 후 중위 진급 및 퇴역)가 이때 포로가 된 케이스이다.

 

이 당시 유재흥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의 다음 대화가 지금도 회자된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모르면 끝나는 것이오?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고,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한국군의 지휘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국군 전시작전권을 가져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재흥은 군()에서 살아남아 1957년에 현재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연합참모총장이 되었고, 1959년 제1군사령관이 되었다가 19604.19 혁명을 전후하여 중장으로 퇴역했다.

 

또한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주 태국 대사로 있던 1962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 1963년 주 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고 1970년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197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퇴임 후 1974년부터 6년간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있었다.

 

1978년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83년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1991년 성우회 회장이 되었다.

 

현리전투 당시 포로로 북한에 끌려가 43년 만에 돌아온 조창호 중위는 탈북 후 유재흥 장군을 면담하여 당시 왜 우리 국군들을 버리고 도망갔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내 만남을 거절당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니 당시 유재흥의 패전이 어쩔 수 없었다느니, 또는 사실이 많이 왜곡되었다느니,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렸다느니'하는 해괴 망칙한 일말의 양심도 없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자들의 입놀림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당시 현리 전투에서 지휘관을 믿고 따르다 어이없게 죽은 우리네 국군 병사들은 누구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는가.

 

장군은 졸병하고 다르다. 비록 6.25 전쟁이 우리 아군의 열세에다 퇴로까지 차단된 상황이라지만 용기 있고 의지력 있고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휘관이라면 솔선수범하여 예하 사단장들과 지휘관들에게 명확하고 단호하게 일절 후퇴불가와 목숨을 건 사수를 지시하여 두려운 상태를 회복해야 했다.

 

유재흥을 지지하는 그들의 말대로 유재흥은 사람은 좋았을지는 몰라도 전형적인 책상물림 장성이지 야전 지휘관 감은 못되었던 것이다.

 


유재흥은 20111126일 숙환으로 별세했고,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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