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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3/15  영남신문
삼성그룹 - 이병철

미래사회에 대한 영감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삼성전자!

 

풍부한 디지털 경험으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삼성전자는 기술, 제품 그리고 솔루션 혁신을 선도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모든 사람이 흥미를 느끼고 기대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제공하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삼성전자 50년을 탐방해보자.


이병철(李秉喆)1910212일 경상남도 의령 출생으로 아버지 이찬우(李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22녀 중 막내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호암(湖巖)이다.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같은 해 9월 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그후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해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병철은 열아 홉 살이 되던 1929년 박두을(朴杜乙)과 혼인하고, 193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이병철은 사업에 뜻을 두고 아버지로부터 300석 추수의 토지를 분재받았다. 1936년 첫사업으로 정현용(鄭鉉庸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같은 해 6월 일본인 경영의 히노데자동차회사(日出自動車會社)를 인수했으며, 또한 토지에 투자하여 200만 평의 대지주로 등장했으나 실패하고, 협동정미소와 히노데자동차회사를 매각, 부채를 청산했다. 1938년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였고, 1947년 상경하여 1948년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착수하였다. 1950년 일본경제시찰단원으로 업계를 시찰하였고, 6·25전쟁 때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환도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1953년부터 상업자본에서 탈피하여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자본화하였다. 같은 해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54년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이승만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런 50년대의 탄탄한 성장으로 5.16이 일어날 무렵에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이 된 상태였다. (당시 삼성이 비료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국내비료수요를 멋대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 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16이 일어난다.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인인 이병철은 '부정축재자 1'로 불렸다.


군사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 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정부의 도움으로 비료공장 설립도 재개할 수 있었다. 지방의 명망 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 회장은, 화폐개혁 당시 대통령의 경제 자문을 맡기도 했지만, 초창기 반()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에 가까웠다는 후문이다.

 

이병철은 10년의 곡절 끝에 비료 공장이 세계 최대 규모인 연 36만 톤 생산이 가능한 사업장으로 완공되려던 즈음, 사카린 밀수 사건(1966년 삼성그룹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터지며 삼성은 전()국민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이병철의 지시하에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이병철은 완공 예정인 한국 비료 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고, "한수(漢水) 이남 제일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경주 최씨 가문에게 기증(寄贈)받은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를 정부에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을 걸었다.

 

그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경영을 장남 이맹희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968년 삼성그룹에 다시 복귀한다. 이후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19604.19민주혁명, 19615.16 군사정변의 격변을 연이어 겪는 과정에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고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겪은 후,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몇몇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으나 이내 포기한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과 중앙일보(1965).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 대한민국 3대 일간지로 성장했지만 TBC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KBS로 통폐합돼 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

 

신군부에 의해 동양방송이 강제적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당시 방송계에선 이 회장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국비료 헌납 때도, 언론통폐합 때도 기복(起伏)을 드러내지 않고 다음날 출근해 집무실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다른 사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한일은행·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를 설립하고 대구대학및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 전자통신 및 반도체 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삼성전자는 1969년 삼성전자공업으로 창립한 후, 1983년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고, 1984년 상호를 삼성전자공업에서 지금의 삼성전자로 이름을 변경했다.

 

창립당시 우리나라 가전업계는 지금의 LG전자인 금성사, 대한전선이 시장을 선도했고 삼성전자는 후발주자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삼성이 전자사업에 뛰어들면서 삼성과 금성사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과 금성사 구인회 회장은 같은 고향, 같은 초등학교 출신인데다 이회장의 둘째 딸과 구회장의 삼남이 결혼해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었다.

 

또한 삼성이 전자사업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국내 대. 소규모 전자업계가 모여 삼성이 전자사업을 하면 가전 업계 공급과잉으로 다 도산할 수 있다며 강경투쟁은 물론 대정부 건의서 까지 내며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을 막으려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사도 동종업계의 저지도 이병철회장의 전자사업 진출 의지를 꺽 을 수 없었다.

 

삼성전자는 설립 이듬해인 1970년에 처음 흑백 TV 생산을 시작으로 19711월에는 중남미 파나마에 제품 500대를 수출하면서 세계 시장 제패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또한 국내 최초로 순간 수상방식을 적용한 '이코노 TV‘를 생산하여 이전까지는 TV를 켜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이 제품은 TV를 켜면 예열 없이 바로 화면이 나오면서 전기도 줄일 수 있는 모델이었다. 곧 삼성은 TV가 겨지는 시간을 단축하는 이코노 TV’를 출시하며 국민들의 이목은 물론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98년에는 국내 최초로 '명품 완전 평면 TV'를 출시했는데, 이전까지는 브라운관 화면이 앞으로 불룩하게 나온 모습이었지만 이 제품은 완전히 평평한 화면을 갖춰 소비자들의 큰 이목을 끌었다.

 

아울러 삼성전자는 2010년 세계 최초로 TV용 콘텐츠 장터(앱스토어)를 선보인 데 이어, 2011년 스마트TV를 본격 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단지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TV로 인터넷 콘텐츠를 즐기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스마트TV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오늘날 세계 1위로 도약한 삼성전자 냉장고의 출발은 1970년대였다. 1974년 삼성전자가 최초로 생산한 냉장고는 강력한 단열재와 타이머에 의한 자동 서리 제거 방식 등 국내에서 처음 성에가 없는 냉장고를 출시했다.

 

1982년 세계 최초로 용도에 따라 냉동 칸을 냉장 칸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다목적 냉장고를 선보여 혁신을 꾀했으며, 1997년에는 국내 최초로 프리미엄 양문형 냉장고를 선보였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양문형 냉장고 시장은 해외 브랜드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지펠' 브랜드와 함께 선보인 이 제품은 가격이 세배나 비쌌지만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당시 톱 탤런트 이영애가 광고하여 결혼하는 사람의 꿈, 로망을 자극했다.

 

이것을 발판삼아 삼성전자는 초대형 냉장고 시장 1위 자리로 올라섰으며, 삼성전자는 이후 16년 연속 국내 양문형 냉장고 1위 자리를 지켰다.

 

또한 1980년 당시 대우가 주름잡던 세탁기 시장에 삼성이 마케팅 승부수를 뛰 운다. 신제품으로 내놓을 신바람 세탁기 모델로 당시 최고 톱스타였던 배우 최진실을 내세우며 세탁기 시장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삼성전자에서 많은 제품들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판매되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성전자의 대표 브랜드인 삼성 애니콜(SAMSUNG Anycall)’이다.

 

삼성전자는 1980년대 후반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의 지형에 난통화지역이 많아 문제점을 보완하는 제품들을 개발하는데 주력하였고, 199410월부터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애니콜의 의미는 '언제 어디서나 통화가 잘 된다'는 뜻으로, 그 시절 대한민국 휴대전화 선두 업체인 모토로라를 겨냥하여 만든 브랜드이며, 당시 고도의 급성장을 하여 전 세계에 수출되었다.

 

당시 대표 브랜드인 스킨폰은 세계에서 가장 얇은 13.8mm 라는 슬림형 디자인으로 휴대전화 보조금이 지급된 시점에서 출시하여 약 45일여 만에 16만대를 판매하여 애니콜 최고 히트기록인 "최단기간 최다판매" 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삼성전자가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이처럼 빠르게 성장을 하게 된 것은 당시 국내 가전제품 비즈니스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으며, 제품 수출도 시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기술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우뚝 설수 있었던 것은 핵심기술이자 산업의 쌀로 불리 우는 반도체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이건희 회장 : 반도체 사업을 해야겠습니다.

이병철 회장 : 반도체라니 그게 뭐냐?

이건희 회장 :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건데 향후 미래의 먹거리 산업이 될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 : 첨단 산업 쪽에 투자하기에는 위험요서가 많으니 투자는 신중히 생각해보자.

 

이건희 회장의 지속적인 설득에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농업국가에서 초기 산업국각로 진입하는 시기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첨단 산업에 투자하기에 위험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흑백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가 경쟁하던 시대에 형체도 보이지 않는 반도체 이야기를 하니까 한국에 돌아와서도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의식주조차 해결 안 되는 상황에서 반도체 사업을 낙관할 수 없었다.

또한 반도체는 자본 투입이 많아 시장이 확보 및 기술적인 측면으로 볼 때 리스크가 많았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198328일 도쿄구상을 통해 긴 고민 끝에 마침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1983년 미국의 한 젊은이가 이병철 회장을 찾아와서 제가 만든 컴퓨터를 소개하고 싶다.” 고 했다. 두 사람은 반도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젊은이는 훗날 세계적인 기업 애플의 스티브잡스였다. 스티브잡스는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면 공급해달라고 했다. 이후 애플은 삼성의 반도체를 공급받는다.

 

드디어 19845월 기흥 공장이 준공되어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에 투자를 하는 것은 충분한 여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성공시켜야만 첨단산업을 꽃피울 수 있다며 삼성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이 사업을 진행했다.

 

공장 건설 후 64km 행군을 했는데 이것은 64k D램을 개발하자는 의미로 용인연수원에서 무박2일로 행군을 했다. 이후 본격적인 반도체 개발이 시작되면서 직원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며 반도체 연구에 몰두했는데 그야말로 맨 땅에서 시작했다. 직원들은 매일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며 반도체에 미쳐있었다.

 

당시 반도체 연구 개발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웨이퍼 25장을 한 런이라고 하는데 한 런을 가지고 프로세스가 진행이 되어서 다음 과정으로 옮기게 되는데 수십 개의 런이 몇 과정 못가고 실패하면 또 다시 런을 넣으며 문제점을 공부하고 또 하기를 여러 수 천 번 반복했다. 반도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직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사무실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한 연구진은 너무 놀라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며 어느 누구도 성공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삼성의 반도체 성공에 전 세계는 놀랐으며 특히, 독일은 거의 경악수준이었다.

 

64k D램은 당시 최대 용량에 해당하는 D램이었으며, 글자로 약 8,000자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발의 의미로는 미국과 일본 중심의 반도체 산업이 한국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반도체 개발로 기술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반도체 생산국가가 되었다.

 

삼성전자 1기가 D램 개발로 미국 인텔서 1억불 유치를 시작으로 반도체 성공 신화가 시작되었다. 반도체 산업은 지난 2014년 단일 품목으로는 최초로 600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우리나라 수출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매출이 없었다면 국가 경제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할 당시 모두가 반대하고 안 된다고 했을 때

넓은 혜안으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이병철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다.

 

한편 이건희 회장의 혁신경영도 빼놓을 수 없다.

1987년 회장 취임 후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1990년대에는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꾸자는 메시지가 대표적인 혁신경영이었다. 1995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의 불량품 전량소각은 품질의 삼성전자로 가는 승부수였다.

 

기술의 삼성전자는 2010년 매출액 기준 세계최대 전자회사로 등극했으며, 2015년 기준 10년 연속 세계TV시장 1위를 지켰다. 주력 사업으로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보모바일 기기, 소비자가전 분야이다.

 

2018년 현재 삼성전자는 반도체(D램과 낸드플래시), 스마트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QLED TV, 냉장고 품목에서 세계 1위 기업이며,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동차 전장산업 등 미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경기도 수원 삼성 디지털시티에 위치한 전자산업사 박물관인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Samsung Innovation Museum)’을 운영하고 있는데, 모두에게 활짝 열린 기업 박물관을 표방하며 대중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


연간 방문자 수도 꾸준히 늘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 관람객이 삼성전자 연구원으로 변신해 전자산업의 핵심 키워드를 연구해보는 어린이 연구소와 중학생 대상 진로 탐구 지원 프로그램인 청소년 이노베이션 워크숍은 관람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제 삼성전자는 모든 사람이 흥미를 느끼고 기대하는 미래를 만들고자 지금까지 이룬 성과의 토대 위에 새로운 능력과 전문성을 구축해 세계 최고의 제품을 제공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반도체를 고집했던 이병철 회장. 그의 뜨거운 외침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 기술로 독자개발한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라이병철 회장의 지론은 시대가 원하는 사업을 한다.” 였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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