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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8/02  영남신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 정주영

정주영 회장은
1998'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켰다.

 

현대그룹 창시자 정주영 회장은 한국정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일으킨 경제신화의 주역이자 자수성가형 사업가이다.

 

정주영의 성공 비결은 자신이 가진 몸뚱이와 신용이었다.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6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주영의 부모님은 소작농이었고,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소학교도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게 가난은 부모가 정말 뼈빠지게 일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이런 정주영은 어린 시절부터 배고픔이 너무 싫었고, 부모님처럼 계속 소작농으로 남는다면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일푼으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막노동을 하며 생활하게 된다.

 

정주영이 서울로 상경을 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동네 면장의 집에 배달된 신문을 몰래 훔쳐보다가 서울에는 다른 세계의 세상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상경한 정주영은 막노동을 하다가 신당동의 북흥상회라는 쌀가게에서 배달원을 구한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여주고, 가게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월급으로 쌀을 한가마나 준다니...” 정주영은 곧바로 쌀가게로 달려가 주인에게 일을 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쌀가게 주인의 단 한마디 자전거는 탈 줄 아나?” 질문에 . 잘 탑니다.“(실제 그는 자전거를 못 탔다)답변으로 정주영은 그렇게 바랐던 고정된 직장을 잡았다.


정주영은 취직한 첫 날부터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도 첫새벽에 가게 앞을 쓸고 물까지 뿌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매일 쌀가게 정리정돈은 물론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 것이다.

 

며칠 뒤 주인은 쌀 한가마를 왕십리 자신의 집으로 배달하라고 했는데 그 날은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정주영은 무턱대고 쌀가마니를 싣고 가다가 비틀대다 마침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쌀가마니가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고, 무엇보다 자전거의 핸들도 휘어져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주영은 자전거를 못 탄다고 주인이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하지..당장 나가라고 할지도 몰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정주영을 보고 비 오는데 수고했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정주영은 그날 밤부터 밤잠도 안자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그 뒤 정주영은 한꺼번에 쌀 두가마를 싣고 배달하는 날쌘 제비처럼 최고의 배달꾼이 되었다.

 

이렇게 성실히 일하다보니 주인의 신임을 얻어 정주영은 장부 정리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3년쯤 지나 1년 월급으로 쌀 20가마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개인적 사정으로 가게를 내놓아야 되겠는데 정주영에게 인수를 하라고 한 것이었다. 단골도 그대로 물려받고 인수 자금도 나중에 벌어서 갚으라는 초특급 제안이었다.

 

정주영은 하루아침에 쌀가게 배달원에서 주인이 되었다. 이것은 평소 정주영의 신의·성실의 결실이었다. 19381월 정주영은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경일(京一)’은 경성에서 제일이라는 뜻이다. 그는 단골손님을 더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그러나 정주영의 첫 사업은 일제의 미곡통제령으로 곡식 거래하는 일마저 힘들어졌기 때문에 허망하게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절망한 정주영은 다시 뭔가를 해야만 했다.

 

1940년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의 소개로 자동차 정비에 관심을 가지고 되고, 1941년 쌀가게 단골이었던 오윤근이란 사람으로부터 3000원을 빌려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된다.


정주영의 자동차 수리공장 성공은 자동차는 수리기간이 너무 길다는 사람들의 불만을 생각해 다른 수리점보다 더 빨리 된다는 점을 강조해서 정주영의 정비소는 많은 돈을 벌게 되고 빌린 돈도 모두 갚게 된다.

 

하지만 공장화재로 사업장이 모두 불타게 돼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정주영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오윤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 3500원을 더 빌리게 된다. (이 믿기 힘든 일화는 오윤근의 정주영에 대한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함.)


정주영은 다시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 3년 만에 빚을 모두 갚고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이 공장은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 흡수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해방 후 1946, 정주영은 서울 충무로에 "현대 자동차 공업사"를 설립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현대 자동차의 모태가 된다. 원래는 자동차 수리점이었으나 미군부대의 자동차를 고치는 일을 맡게 되어 자동차 개조업으로 확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정주영은 미군부대에 수리한 자동차 가져다주고 경리부서에 수리비를 받으러 갔는데, 미군부대에서 큰돈을 받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건설업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 자기도 건설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그는 건설업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나 단지 건설업자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이유로 건설업을 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건설이다. 정주영은 "일단 뛰어들고 밀어 붙인다" 이는 이후 정주영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사업 스타일로 굳어지게 된다.

 

한창 사업이 잘 돼 가는데 6.25전쟁이 일어나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는 부산에서 미군의 잠잘 곳을 짓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미군한테 인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주영은 전쟁 후 부산의 부서진 다리를 잇는 공사를 맡았는데 물자의 부족으로 어려웠지만 꼭 해내야 한다는 의지로 집도 팔고 공장도 팔아 다리를 잇고 남은 건 빛뿐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무슨 일이든 해낸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대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한국전쟁은 정주영에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시에 그는 미군이 발주하는 긴급공사를 대거 수주했고, 전쟁 이후에는 도로·교량·항만 등 파괴된 국내 사회간접시설 복구 사업을 떠맡아 비약적으로 회사를 키웠다. 정주영이 건설업으로 성공한 것은 그의 탁월한 지능과 초인적인 집념 때문이었다.

 

1952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미군은 정주영에게 양변기와 난방 공사를 맡겼다. 문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양변기. 정주영은 용산 일대를 전부 뒤져 양변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물품과 정보를 찾아왔고, 12일간 밤낮을 샌 끝에 기어코 공사를 끝마쳤다.

 

1953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UN 사령부는 사절단 참배에 앞서 부산의 유엔 군 묘지에 푸른 잔디를 깔아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때는 한겨울. 모든 건설업체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부했으나, 정주영만은 공사비를 3배로 올려 받고 낙동강 근처의 겨울보리를 떠 다가 묘지에 심었고, UN군 묘지를 푸른 풀밭으로 바꿔 놓았다.


이 두 가지의 일이 있은 후 미군의 대규모 건설 수주는 모두 정주영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정주영에게 몇 차례의 시련을 안겨 줬다. 1954년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6500만 환이 넘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본 것이다. 당시 국가가 발주한 공사 중 최대 규모였던 이 교각 복구는 지독하게 불리한 건설 환경, 열악한 장비, 거기에 인플레까지 겹쳐 정주영에게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안겨 주었다.

 

정주영은 이 빚을 갚는 데만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비록 적자는 보았으나 정주영은 정부의 신용을 얻어,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는 등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61년 군사정부의 수립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그의 회사는 더욱 번성했다.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작하여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이후 1966년 전쟁 중의 베트남 복구사업, 메콩 강 준설공사에도 참여했지만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와 건설 여건 덕에 현대건설은 다시 한 번 엄청난 빚을 지는 등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8년 미국 포드 자동차와 합작으로 현대 자동차의 첫 번째 작품인 "코티나" 시판했는데, 이때까지 현대 자동차는 포드 자동차의 부품 조립 생산기지에 불과했다.

 

1970년 정주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공사였던 총 길이 428키로미터의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2년만에 완성하면서 다시 한 번 믿음과 명성을 얻게 된다. 총 공사비 429억원, 공사기간 290, 공사 중 사망 인원 77명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과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짧은 시간으로 만들어진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의 완공으로 대한민국은 운송이 편리해지면서 많은 경제발전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 후 정주영은 자동차를 만드는 일이었다. 100% 국산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 살길이라 판단하고 1억 달러를 들여 년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이는 정주영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당시 국내에 연간 판매되는 자동차의 수는 1천대도 되질 않았으며, 당시 현대가 갖고 있던 자금 규모로 년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수출로 돈을 벌면 된다"며 밀어붙이게 된다. 자동차 개발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정주영은 아예 해외시장을 공략해 수익을 얻겠다는 기개를 보여준 것이다.

 

드디어 1976년 대한민국의 첫 번째 독자적 자동차 브랜드인 포니를 출시하게 된다. 그 해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 장악,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수출되기 시작, 첫해에만 1만 대가 판매됐다. 1970년 말부터 년간 5만대에서 10만대로 생산을 늘렸다.

 

포니의 대대적인 성공에 힘입어 1982년에는 포니2 출시하여 첫해 국내에서만 4만대 판매했고, 1983년 캐나다로 수출하여 1986년 한해에만 8만대를 판매했다.

 

1985년엔 미국 현지 법인 설립하여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3대 방송국에 "Cars that make sense"라는 슬로건으로 TV 광고를 띄우게 된다. (당시 한국이 아직 원조물자로 연명하는 줄 알았던 미국 교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함.)


1986년 또 다른 신형차 "엑셀"을 출시해 1987년 미국 시장에서만 26만대를 판매해 미국 수입 소형차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은 한국이 경공업 중심의 경제에서 중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발전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산업에의 도전 과정은 출발부터가 극적이었다. 현대가 땅 위의 건물을 잘 지으니, 물 위에 건물을 짓는 것처럼 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소형선은 일본, 대형선은 미국이나 노르웨이 등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조선 산업을 위해서는 우선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배를 지어본 경험은커녕 배를 만들 조선소도 없는 상태의 회사에 돈을 내어줄 은행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투자를 받기 위해 조선소를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리고 유조선 도면을 들고 유럽으로 떠났다. 단지 배를 몇 척 팔아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은행 바클레이즈에서 거절을 당한 후 정주영 회장은 바클레이즈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만한 인물을 찾아갔다.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이었다. 그의 추천서를 받으면 바클레이즈의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전략이었다. 롱바텀 회장의 반응은 역시나 시원치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때 그가 꺼내들었다는 게 바로 500원짜리 지폐였다. 정주영은 500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한국은 역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우리 민족의 역량을 믿어달라며 롱바텀을 설득했다. 놀라운 재치다. 정주영은 결국 그를 설득했다.

 

롱바텀 회장의 추천서를 받고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또 다시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다.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이 선박 주문서를 받아와야 차관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아직 조선소도 없는 회사가 선박 발주를 받아야 한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 어려운 일을 또 해냈다.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에게서 26만톤의 배 두 척을 주문받은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 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다 돌려준다는 파격적인 두 가지 조건을 걸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였다.

 

드디어 19723, 울산 백사장에 현대울산 조선소가 세워졌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배를 건조해본 경험도 없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세계 최대 선주인 리바노스가 선박을 발주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배도 아니고 마침내 당시 최대 규모의 선박이었다.저 배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였다.

 

발주 기한은 빠듯했다. 정주영 회장은 배를 제 때 만들어 넘기기 위해 묘안을 냈다.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조선소 밖에서 선박을 건조해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선박을 건조해 배를 바다에 띄울 수 있도록 하는 독(dock)도 없는 상황에서 선박 건조는 시작됐다. 양쪽으로 독이 커 나가면서 배의 크기도 따라 커졌다.

 

정주영 회장은 도크를 만들면서 26만톤급의 유조선을 건조하고, 바다를 준설하고, 14만평의 공장을 세우는 일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그렇게 19746, 현대조선중공업 준공식이 열리고, 대한민국 1호 선박(애틀란틱 배런)이 탄생했다.


매일 2200여명이 인력이 밤낮없이 매달려서 겨우겨우 해 낸 일이었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는 정주영 회장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10년 뒤인 1983년에 건조량 기준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랐다.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조선과 건설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이때 정주영은 석유 파동의 근원지인 중동으로 가서 일을 해야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베트남과 태국에서의 악몽을 떠올린 회사 중역들은 몸을 던져 정주영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주영은 이들을 모두 진압하고 중동에 진출, 93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게 된다.

 

세계 굴지의 건축 회사들이 모두 입찰했던 이 공사 수주에서 현대가 이긴 것은 가장 저렴한 금액에 공사 기간을 8개월이나 단축시킨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이때 현대가 벌어온 건설 수주액은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외화였으며, 이후 현대의 해외 건설 수주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1126억 달러를 기록, 한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현대는 이로써 건설, 자동차, 조선 3개의 주력 사업을 세계 시장에 성공시키게 된다.

 

1984년 서산 방조제 공사에서 극심한 조류로 공사에 난항을 겪자, 정주영은 고철로 팔기 위해 가져온 스웨덴의 20만 톤급 유조선을 가라앉혀 파도를 막은 후 그 위를 메우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정주영의 이런 기지로 공사비 290억원 절약해 이 일화는 이후 "정주영 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이후 정주영은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정주영은 평소 정치적 불안을 가장 두려워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업가라도 정치적 변동 앞에서는 순식간에 망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왔고, 이에 그는 자신이 경제를 잘 하는 대통령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주영은 대통령 선거에 참패하고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국회의원직까지 버리고 정계에서 영영 은퇴한다.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에는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2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은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켰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정주영은 "난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입버릇처럼 말 할 만큼 사원들과 어울리길 즐겼다. 특히 현대 공채 1기 출신들은 정주영 회장을 "아버님"이라 부를 정도로 굉장한 유대감을 자랑한다. 정주영은 사원들과 술자리를 자주할 뿐만 아니라 운동도 노래도 같이 하는 등 사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한 정주영은 한번은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맥주 다섯 병에 안주 한 접시를 시켰는데 나갈 때보니 맥주 두병을 마시지 않은 걸 보고 두병 값을 깎아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구두를 한번 신으면 뒤축을 갈아가며 10년 이상 신었으며, 언제나 외제차가 아닌 현대 중형차를 타고 다녔다.

 

극빈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200186살의 나이로 별세한 정주영은 83개가 넘는 사업체를 일으키고, 130조원이 넘는 매출을 내는 세계적 기업을 세웠다. 정주영의 마지막 청운동 자택에는 낡은 구두, 구멍 난 면장갑, 낡은 금성 TV 수상기가 있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상식에 갇힌 생각을 거부하고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창의력과 직관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정주영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이상이나 꿈을 잃지 않았다. 그가 현대중공업을 창업했을 때 당시 대형조선소를 건립 할 수 있는 자금도 전무했다.

 

특유의 뚝심과 정신력으로 엄청난 추진력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성공을 했다.

 

잠 다 자고 어느 세월에 따라잡나?

이봐, 해봤어? 해 보기나 했어

어렵지만됩니다. 됩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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