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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7/01  영남신문
철강왕 – 박태준

제철보국' 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


6.25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시절에 '제철보국'을 내세우며 포항제철을 세워 한국의 철강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만들어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박태준 회장.

 

박태준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아버지 박봉관과 어머니 김소순 슬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해방되어 곧마로 귀국하였고, 1948년 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소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을 거치는 등 육군 초창기 일선에서 뛰었다.


19615.16 군사정변으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자 박태준은 의장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경제분야 최고위원으로도 일하게 된다. 경제인으로서 소양을 이때부터 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마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의 끈끈한 관계의 역사도 상당히 깊다. 해방직 후, 박정희와 박태준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57년 무렵부터 이 둘의 사이는 가장 신뢰하는 사이로까지 깊어졌다.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 상황은 전쟁이 끝난 후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당장 의식주 해결이 더욱 시급했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1962년에 시작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가난하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힘을 모아 경제 개발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철강이었다.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경제 개발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철강의 자체적 생산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도 제철소를 세워야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있었지만 일관 제철소 건설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것에 국민들조차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한국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미래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철강산업에 대한 경험, 기술, 자본 그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했으며 경제 사정상 제철소 건설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1962년에 시작된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실질적 내용은 건설, 자동차, 조선 등모든 것들이 철강과 관련이 있었고 철강 산업의 발전이 우선되어야만 했다. , 산업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제철소이다


실질적으로 철이 없으면 국가적인 경제 개발이 힘들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다. 철이 없으면 수입을 해 와야 하는데 가난한 국가에서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수입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입의존형 경제구조가 되어 경제성장의 걸림돌이 될 것이 자명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계획과 제철소 건립은 불가분의 관계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5개년 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포함시키며 박태준에게 이 일을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철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박태준은 할 수 있다라는 이 한마디에 대한민국의 철강 산업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박태준은 1964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 아래, 대한 중석을 맡게 되는데 적자 덩어리의 회사를 1년 만에 흑자로 돌려세우며 경영 혁명을 일으켰다. 대단한 능력이었다. 이렇게 경영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제철소 건립의 적임자로 박태준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제철소 건설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제철소 건설에 드는 막대한 돈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1967,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KISA(제철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에서 한국 제철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설립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

 

다급했던 박태준은 자금을 구하기 위해 급히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국에서조차 거절당했다. 이처럼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게 되자 그가 떠올린 돌파구는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박태준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일본의 동의를 받아내어 제철소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금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 격으로 당시 청구권으로 받는 금액은 농업과 수산업에 쓰게 되어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우리나라의 급격한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이와 같은 조건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박태준이 청구권의 사용처를 두고 일본과 협상을 추진한 것이다. 결국 이 자금을 바탕으로 철강 산업을 일으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박태준은 입버릇처럼 제철소는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것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청구권으로 받은 금액이니 이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시에는 내 생명도 던지겠다는 각오였다. 실제로도 공장 착공부터 완공시기까지 박태준 사장 이하 전 직원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일을 진행할 만큼 상당한 열의를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박태준은 당시 일본 철강사들을 두루 방문해 건설자금은 물론이고 도면 설계부터 기술까지 도움을 끌어냈다. 수많은 일본인 기술자가 현장 인력이나 기술고문의 형태로 포항제철 건설에 힘을 보탰다.

 

밤잠을 설치며 공사에 전념한 끝에 197469일 드디어 제1용광로에서 쇳물이 쏟아졌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이 문을 연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제철산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종합 제철소인 포항제철이 건립되는 것마저도 기적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철강왕은 기적에 기적을 일으키며 포항제철을 키워갔다


제철소 운영에 아무런 지식조차 없었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고자 한 박태준이다. 신일본제철이 박태준 회장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한국의 제철산업을 일으키는데 크게 일조를 하게 된다.

 

박태준 회장은 훗날 신일본제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중국의 등소평이 중국에 제철소 건립을 위해 일본 기미쓰제철소를 둘러본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 이런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덩샤오핑이 이유를 묻자,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고 했다. 신일본제철에 도움을 청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기 때문에 안된다라고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만큼 박태준을 능력을 높게 샀던 신일본제철이다.

포항제철의 완공은 빈곤의 나라 대한민국을 무역 1조 달러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에 공이 컸다. 불모지의 땅에서 박태준의 땀과 열정이 담겨 대한민국은 제철 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7346억 원이던 당기순이익은 박태준이 물어나던 1992년에 이르러 1852억 원으로 불어났다. 40배 이상의 성장이었다. 또한, 1992년에 세계 1위의 제철량을 보유했던 대한민국이다. 이는 모두 포스코의 공이었다. 그가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라고 칭송받는 이유는 또 있다

 

해외에서 '박태준' 이름 석 자()'한국의 철강 기적'과 동의어였다.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는 포스코의 성공 요인을 "모험사업을 추진하는 리더로서 지도력·통찰력·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은 1992'포항제철의 경영 성공 사례' 연구에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1968IBRD(국제부흥개발은행)"한국의 외채 상환 능력과 산업구조를 볼 때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라며 한국의 융자 신청을 거절했다. 당시 IBRD 실무 책임자였던 존 자페는 1986년 박태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 가을 박 회장은 보험회사로부터 6000만원의 거금을 리베이트로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내밀었지만 박 대통령은 알아서 쓰라고 했다. 박 회장은 이 돈으로 장학재단을 세웠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 회장은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대는 일본업체 물건을 쓰라"는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요구를 다섯 차례나 거절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뻣뻣한 박 회장에게 '소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훈장으로 여겼다.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던 박 회장은 1974년 가을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이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장롱 속에는 이불과 옷, 금고 속에는 집 문서와 패물 몇 가지가 전부였다.

 

197781일 발전 설비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은 콘크리트가 10cm 정도 덜 쳐진 곳을 발견했다. 이튿날 건설 현장의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임직원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80%의 공정이 진행된 구조물을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손실은 봤지만 '포철(현 포스코)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무형의 자산으로 남았다. 또 하버드대 등의 경영학 교재에 모범 경영 관리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 회장이 '공장 관리 원칙 1'라고 강조했던 것이 바로 '목욕론(沐浴論)'이다. 그는 "목욕을 잘해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정돈하는 습성이 생겨 안전의식이 높아지고, 제품 관리도 잘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원 기숙사를 찾을 때면 늘 목욕탕을 먼저 가볼 정도로 목욕을 강조했다. 1985~1987년 제철소 내 목욕탕·화장실 개·보수 때는 50억원을 들여 서울 특급 호텔 수준으로 바꿔 놓기도 했다.

 

박태준 회장은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며,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여 정계에서도 활약을 했다.


19978월에는 경북 포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15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여 앞둔 11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입당해 총재에 취임하는 한편 지역연합 성격의 이른바 '디제이티(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을 성사시킴으로써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고 양당 공동정권 창출에 성공했다.


이어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재직하다 정계를 은퇴하고 모든 공·사직에서 물러났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 설립 25년 만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합쳐 2100만 톤 생산체제를 달성하는 성과도 이뤄냈다. 이는 생전에 1천만 톤 생산 체제를 구축한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카네기는 19세기의 철강왕, 그리고 박태준은 20세기의 철강왕으로 불리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이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박태준 회장이다.

 

박태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철강신화를 이룩한 그의 업적은 분명히 인정을 해줘야 할 부분이다. 만약 포항제철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을 것이다. 한국 산업 능력 자립을 위한 근간이 되었던 철강산업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데 포항제철이 밑거름 역할을 아주 톡톡히 했다


자동차 산업은 현재 손꼽히는 계 굴지의 기업으로까지 성장했으며 조선 산업 역시 세계 1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포스코가 있었다.

 

박태준 회장은 현장에서 늘 "나는 사장이 아니라 전쟁터 소대장이다. 전쟁터 소대장에겐 인격이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 건설업 수준에서 지휘자가 고매한 인격에 매달린다면 자신의 인격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 대업을 망칠 것이라는 얘기다.

 

박 회장 손에는 늘 군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지휘자의 지휘로 악기가 혼연일체가 될 때 아름다운 곡이 나오는 것처럼 박 회장은 포스코 경영을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그는 "모든 기계가 고유 기능을 가진 것처럼 수천 명의 종업원 개개인은 특성이 있다""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기계를 효과적으로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박태준 회장은 20111213,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 곤란 증세로 치료받고 회복 중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포스코를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삼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태준 회장은 금탑산업훈장·국민훈장무궁화장·오스트리아 금성공로대훈장·서독공로십자훈장 등을 받았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사후에 박태준은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인이 되었다.

 

항상 결과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두고 최종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박태준은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고 말했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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