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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4/30  영남신문
대우 성공 신화의 주인공 – 김우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통해 셀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한 많은 직장 젊은이들에게 우상이었던 김우중은 19361219일에 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 사이의 6 남매 중 4 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김우중은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 어머니 아래서 소년 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게 된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무역관련 일을 하면서 수출 산업에 눈을 뜨게 된다.

 

31살 이른 나이에 협력사 대도실업과 자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대우라는 사명을 내걸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과거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는 1세대 사업가라고 부른다면 김우중은 1.5세대 창업가이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들과의 연령차도 있지만 토지 세력에서 산업자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김우중 회장은 겪지 못했다.

 

그리고 김우중은 창업자이면서 전문경영인 스타일이었다. 똑똑하고 많이 배웠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사업가들에 비해)

 

자본금 5백만원으로 시작한 대우실업은 1967년 최초로 동남아시장에 직모를 수출한다. 대우실업의 첫 원단 최초 브랜드는 영 타이거이다. 김우중은 이 미지의 개척지에서 영 타이거알리기에 돌입한다.

 

김우중이 당시 30대에 창업을 했다는 점에서 남들보다 일찍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장사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장사꾼 기질을 숨길 수 없었던 본능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다.

직접 샘플 원단을 갖고 뛰며 김우중은 타이거 킹이라 불릴 정도로 동남아시장에서 원단 무역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대우실업은 설립 1년만인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로 급성장한다.

 

그 시절에는 섬유나 스웨터, 와이셔츠 같은 경공업 제품으로 수출을 시작할 때이다. 이 당시 이 분야의 제일 전문가가 김우중이었다. 그런데 김우중은 직접 해외에 가서 시장조사를 하고 판매를 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던 것이다.

 

1970년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의 1등 공신인 김우중을 각별히 신임했다. 게다가 김우중의 부친인 고() 김용하 전 대구사범학교 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사다. 박 대통령은 그를 더욱 아끼게 된다.

 

두 사람은 사업 이야기뿐만 아니라 고민과 개인사까지 나누게 되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김우중은 1967년도에 대우실업을 만들고 69년도에 수출을 많이 해서 산업훈장을 타는데, 해마다 수출의 탑을 타고 1972년도에는 우리나라의 랭킹 2위의 수출업체가 되어버리니까 박 대통령으로서는 김우중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농업이 주 생산수단이었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에는 겨울에 일이 없네라며 크게 걱정했다. 이 때 김우중이 특별한 아이디어를 냈다.

봉제공장을 지은 뒤 농민들에게 간단한 기계를 나누어줘 스웨터 짜는 일감을 주자는 것이었다. 스웨터 주문을 가져다주고 뜨개질 감을 나눠주니 아줌마들이 호기심으로 몰려들었다.

 

급료를 주는데 농사짓는 것보다 더 나은 급료를 주니 처음에는 10개 정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급료를 현금으로 주니까 아줌마들이 스웨터를 2030개씩을 만들어서 오는 것이었다. 때마침 미국에서 봉제주문이 밀려들어 이른바 공장은 수출에 큰 공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농촌 마을에 있는 공장을 새마을공장으로 지정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 될 때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한 번 김우중의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

 

어느 날 교통부에서 짓던 교통회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다. 서울역 한복판에 흉물스러운 건물이 보기 싫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우중을 불러 공사를 맡겼다. 그걸 좀 종리를 하자고 했던 것이었다. 당시 거기가 국유지 였기 때문에 땅을 정리하는데 토지가 너무 광활해서 잘 안 되었다. 골치가 아픈데 해결사로 나선 사람이 김우중이었다.

 

덜컥 대공사를 맡은 김우중은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자신이 직접 건설 회사를 차려 건설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즉시 부지를 매입하고 대우센터 공사에 착수한다. 대우센터를 완공하기만 하면 건설회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진을 했다.

 

당시 대우는 일반 국민들에게 크게 보여 지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건물을 지으면서 김우중은 이 건물이 대우가 어떻게 일을 한다는 걸 국민들한테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12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대우건설. 4년의 공사 끝에 1977년에 완공한 대우센터 빌딩은 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상징물로 우뚝 섰다.


그 당시에 공사를 할 때 먼지가 많이 나서 건물 주위에 포장을 하고 지었다. 건물이 거의 완성이 되고 포장을 벗겼는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건물이 예쁘다고 칭찬을 많이 했다.

 

당시 대우 직원들도 이것이 우리의 본가다라는 자부심이 상당했다.

누군가 김우중 회장에게 이 건물을 왜 지어셨어요?”라고 물었다.

김우중은 대우가족으로 꽉 채우는 게 목표네라고 대답했다.

 

김우중은 이 대우센터 빌딩 완공으로 건설회사로서의 입지도 다지게 되었다.

대우센터를 짓자 마자 바로 롯데호텔, 교보생명을 짓고 힐튼호텔을 지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울러 1973년에는 해외건설을 시작해서 상당한 붐을 일으켰다. 대우는 해외건설 사업의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김우중은 다시 한 번 ()에서 유()’를 창조해야한다고 판단하여 국제적으로 미개척지인 리비아를 공략하게 된다.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는 어떻게 보면 미개척지였다. 수익성은 선점효과에서 나온다. 미개척지를 먼저 선점한다는 것은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준다. 김우중은 뛰어난 장사꾼의 눈으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첫 번째 공사는 리비아 의과대학 신축공사였다. 날씨가 50도가 넘는 폭염과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막. 그야말로 미개척지에서의 건설은 쉽지 않았다. 모래폭풍과 끝없이 싸워야 했고 기능공의 파업 등 열악한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설현장에서는 물이 없으면 공사를 못하는데 당시 공사 근처에는 80년 동안 물이 한 방울도 안 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김우중에게 왔다. 공사 도중 근처에 엄청난 양의 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납기 내에 그것도 공사기간을 석달이나 앞당겨 대학 건물을 완성하게 된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대우의 공사현장을 지켜보던 당시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는 김우중에게 비행장을 하나 지어 달라고 제안 했다. 그 공사는 이미 세계 굴지의 건설회사도 실패한 난공사였다.

 

하지만 김우중에게 불가능은 없다. 김우중은 즉시 공사를 수락하고 모든 악조건 속에서 공사를 강행하여 1년만인 1980년 비행장 건설을 성공시켰다.

 

김우중은 그 때부터 수시로 카다피와 대면하여 대화했다. 그 뒤 대우건설은 리비아의 크고 작은 공사를 맡아 최대 공사수주를 기록했다. 카다피의 대우에 대한 신임은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카다피는 대우건설을 오작교 삼아 한국에 국가 수교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카다피는 김우중과 대우의 힘에 놀라고 감격했다.

카다피는 한국 사람들이 오랫동안 리비아에 머물면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사라고 한 김우중 그의 개척정신은 늘 시간을 금같이 여기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일 중독자였다.

 

소설가 이문열 작가의 증언

저도 성격이 급해서 식사를 빨리하는 편인데 저보다 더 빨리 하는 사람들이 대우 사장단입니다. 해외출장 중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반쯤 먹었을 때 김우중 회장이 먼저 숟가락을 놓고 나머지 5명이 그대로 일제히 놓습니다. 나는 아직 밥을 덜 먹었는데 놓을 수도 없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무역과 건설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대우는 새로운 사업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바로 자동차 사업이었다. 당시 대우는 미국 지엠(GM)과 자동차 조립생산을 해오다 대우는 지엠의 지분을 전량 인수하여 대우자동차라는 사명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신형 로얄살롱과 로얄프린스등 로얄 시리즈를 내놓으며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또한 국민차 티코의 생산으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한다. ·소형 위주의 자동차 생산으로 동구권, 남미, 아프리카 등에 진출한다.

 

이후 해외에 공장을 불과 34년 만에 열 몇 개나 만들었고, 전 세계에 대우자동차 판매점을 200 400개 만들었다. 이렇게 안 하면 경쟁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고 없이 불어 닥친 태국에서의 발생한 외환위기가 한국에까지 이어져 기업들을 위협했다. 이 쇼크로 국가경제가 흔들리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대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국적기업의 세계경영이라는 것은 자기 본국에서 모든 자본과 기술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여러 개의 법인을 두고 거기서 신용과 금융을 일으켜서 끌고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한 것이 바로 대우의 세계경영이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가 오니깐 그 흐름 자체의 맥이 끊어져서 거대한 부실 그룹으로 평가가 된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천하의 김우중도 어쩔수 없었다.

 

조속한 상황타계를 위해 정부는 대우와 삼성의 빅딜을 제안한다. 대우차가 삼성차를 인수하고 삼성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는 조건이었다. 그룹에서 주력하는 업종을 중심으로 재편하는 큰 그림이 제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그룹간의 기()싸움으로 시간은 흘러갔고 그 사이 부채는 늘어만 갔다.

 

그러나 김우중은 자신을 믿었다. 국가의 골치 덩어리 사업을 맡아 흑자로 전환시킨 경험이 이번에도 대우를 살릴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우전자의 모 임원이 부실 관련 자료를 들고 삼성에 투항을 한 것이다.

찾아가서 대우전자는 이런 부실이 많다며 부실 내역을 깨끗하게 적어서 삼성에 준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빅딜카드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우의 입지는 흔들렸다. 더 이상 자금 수혈이 안됐다. 대우의 몰락이 된 것이다. 정부에서 도와주려고 빅딜을 제시했는데 성사가 안돼 결국 이것은 대우의 몰락을 앞당기는 카드가 되어 버렸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통해 셀러리맨의 신화였으며, 많은 직장 젊은이들에게 우상이었던 김우중은 마침내 손을 들게 된다.

 

서울의 중심부를 호령하던 대우그룹. 공격적인 해외시장 진출로 국가산업에 한 획을 그은 김우중.

 

김우중 회장의 정신과 김우중이 키웠던 기업들은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가장 먼저 가장 멀리 남 보다 빨리 세계무대로 진출한 김우중.

대우가 만들어 낸 수많은 기록들을 훗날 그의 도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김우중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은 인연에서 시작 된다. 마케팅 전략이다 뭐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이 통해야 한다. 사업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하는 거니까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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