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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자: 2019/05/15  영남신문
풍선껌 신화 - 신격호

입 속의 연인롯데 껌을 유행시켜 풍선껌 신화로 일약 일본의 10대 재벌로 성장가도를 달렸던 신격호 회장은 1921년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필순의 5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울주군 삼동면은 영산 신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신격호는 1935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면장을 지낸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하여, 1938년 졸업하면서 경남도립종축장의 기수보(技手補)로 취업했는데 주 업무는 양털 깎기와 양돈 등이었다.

 

그는 계속되는 박봉과 가난을 벗어나고자 1941년 부인 노순화를 비롯해 가족과 고향을 모두 뒤로 한 채 돈을 벌 작정으로 일본에 가기로 결심하고 부관연락선을 타고 몰래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도쿄에 도착해 방을 하나 빌려 자취하면서 우유 배달 등 여러 가지 잡일을 하며 와세다실업학교 고등부의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신격회의 유명한 일화 한 가지.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의 같은 시각에 우유를 놓아주었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중 1944년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신격호는 전당포를 운영하던 하나미스(花光)라는 노인의 밑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평소에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보던 하나미스는 화학을 전공한 신격호에게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고 6만 엔의 거금을 투자했다.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이 80~100엔이었으니, 이 금액은 20년치의 연봉에 해당된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연봉이 3천만 원이므로 이는 약 6억 원 상당의 거금이었다. 이렇게 그의 행운은 성실함에서 비롯되었다.

 

신격호는 이 돈으로 전쟁 통에 수요가 충분했던 커팅오일과 밥솥을 만드는 공장을 차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장이 폭격을 당해서 완파되는 바람에 완전히 쫄딱 망했다. 다시 하나미츠에게 빌려서 다시 커팅오일 공장을 운영하는데 1년 반 뒤에 다시 미군의 폭격으로 망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고, 그의 친구들은 신격호에게 귀국을 권유했으나 그는 일본에 남기로 결정하고,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나미츠도 살길을 찾으라 위로를 하며 거액의 투자금을 포기한다. 진짜 자살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에까지 몰렸으나,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땐 죽더라도 자신에게 거금을 빌려준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으로 일어섰다.

 

1946년 와세다실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번에는 세탁비누, 세숫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류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도 장사는 상당히 잘 되었다. 솥단지 하나로 시작해 1년 반 만에 하나미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집 한 채까지 선물했다.

 

신격호 회장이 처음에 시작한 사업인 비누를 만들고 있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공장에 놀러와 미군에게 얻은 추잉껌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단맛을 모르고 자랐던 신격호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껌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그는 1948년 일본에서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배고픔을 이겨내는 것이 우선이었던 전후 시대에 비싼 주전부리인 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당시 껌을 만들 때 원료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의 바람막이 유리를 녹여 얻은 초산비닐수지와 송진 등을 섞어 녹여서 약간의 향료를 넣고 섞은 다음에 나무판에 흘려서 칼로 자르면 간단하게 껌을 만들 수 있었다.


적은 자본으로 만들 수 있고, 초산비닐수지는 통제품이 아니어서 원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그런데 완벽주의자였던 신격호는 화공과를 졸업해서 스스로 껌을 제조할 수 있었지만, 약제사까지 고용을 해서 껌을 만들었다. 나중에 1개에 2엔에 팔리는 풍선껌이 인기를 모았다.

 

이때 인기를 끌었던 제품은 대나무 파이프 달린 풍선껌이다. 껌을 다 씹은 후에 대나무 파이프에 껌을 붙여서 불면 비누방울처럼 부풀려졌다. 이 아이디어는 장남감이 귀했던 시절에 대히트를 쳤다.

 

이것보다 더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곳은 광고 분야이다. 하리스와의 껌 전쟁에서 그의 아이디어가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19575월에 가요프로그램의 광고를 모두 사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롯데가요앨범이라고 했다. 모든 매체를 총동원했던 것이다.

 

창업 5년 만에 풍선껌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나서, 롯데는 판껌 시장에 진출했다. 신격호는 세계 1위의 껌 메이커인 리글리(Wrigley Chewing gum)를 따라잡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 판껌의 시장점유율 1위는 하리스였다. 이로부터 롯데와 하리스는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하리스는 한국인에게 추잉껌 업계를 넘겨준다.” “돈 벌어 모두 한국에 보낸 답니다.” 이런 악성 소문을 퍼트릴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했다. 이때 롯데는 ‘1000만 엔 현상을 걸었다. 롯데 껌 포장지 안에 추첨권이 있는데, 당첨자에게 1000만 엔을 주고, 부상으로 당첨자가 지정하는 학교에 100만 엔을 추가로 기부한다는 경품을 걸었다.

 

사회적 반응은 대단했다. 1960년도 당시 일본 경제기 획청이 발표한 월 평균수입은 25천 엔에 불과했으므로, 이 경품금액은 33년 연봉에 해당된다. 이는 오늘날 1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일본의 온 메스콤은 그 1천만 엔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였다.

 

하리스의 고발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도 받았으나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서 경고로 끝났다. 결국 상금걸기는 1962년부터 금지되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개입은 더욱 매스컴을 자극했다.

 

이로 인해 그 광고효과는 1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00배의 이익을 본 것이다. 이후에 롯데는 천연치클의 좋은 껌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결국 하리스는 얼마 후 가네보에 합병되고 말았다. 이로써 롯데는 껌 업계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과자점 주인들이 줄을 서서 살 정도였다. 일손이 부족해서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인근 주부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고, 그들에게 명주 옷감까지 선물을 하자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


고학생들에게는 상여금이란 명목으로 학비까지 주자 손쉽게 양질의 노동력이 확보했다. 없어서 못 팔던 시대에 그리고 군부대에 납품하는 껌이었고, 포장에 관심도 없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신격호는 완벽주의 성격 때문 인지, 포장지인 껌 종이에 정성을 들였다.

 

신격호는 그야말로 풍선껌 신화로 일약 탄탄한 돈 잘 버는 사업가가 되었다. 이 때 풍선껌 신화를 만든 일등공신은 바로 롯데라는 회사이름이 큰 역할을 했다.

 

현재 롯데의 성공에는 회사명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주식회사 설립을 앞두고 신격호는 회사의 이름을 롯데라고 지었다. 소비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름을 갖고 싶어 했는데, 괴테가 25세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여인 샤롯데를 생각하면서 롯데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미모와 재덕을 갖춘 롯데라면 모든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을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껴다.”고 하면서,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라며 흡족해했다.


이렇게 회사의 이름을 롯데라고 지은 것은 그가 문학도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 의 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껌 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 롯데는 이제 초콜릿과 캔디 등의 시장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제 1의 종합과자 메이커로 도약하게 된다. 이때도 역시 품질과 아이디어가 롯데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1961년에 과자의 중공업초콜릿 시장에 진출했다. ‘서구를 본받아 서구를 따라잡자.’라는 구호 아래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시대에 초콜릿 생산의 적기였다. 껌만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초콜릿 시장으로 진출했다.

 

당시 초콜릿 업계의 최고는 메이지와 모리나가였다. 초콜릿은 맛의 예술품이었다.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과감한 기술투자가 관건이었다. 유럽으로 비밀리에 기술자를 보내어 최고의 시설과 기술자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초콜릿의 본류인 판(mould) 초콜릿으로 승부를 걸었다.

 

다른 후발주자들은 피복초콜릿이나 충전초콜릿 시장을 들어갔지만, 일류주의를 주장하는 신격호는 당당하게 판초콜릿으로 승부를 걸었다. 수십 명의 기술자를 면담하여 스위스인 무슈 브락크를 선발했다. 그에게 원가에 구애받지 말고 스위스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하여 롯데 가나초콜릿이 탄생했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시장에 진출하여 1960년대 말에 일본 과자업계의 명문이었던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추월하여 일본 제1의 종합과자 메이커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격호는 사업가로서의 거침이 없었다. 1950년 재일한국인이 많은 신주쿠구 신오쿠보에 껌공장인 롯데 신주쿠공장을 설립을 시작으로 1959년 롯데 상사, 1961년 롯데 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그는 1966년 이후에는 사업을 대한민국으로 확장했다. 1965년 한·일 수교로 양국간 경제 교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성공한 신격호는 조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시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외자 유치를 위해 일본에서 사업을 벌이다 국내에 사업을 하려던 신격호 회장의 투자를 종용했다. 그 당시에는 국가에 돈이 없어서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자본에 혜택을 줬는데 롯데는 외자도입특례법에 따라 각종 세금을 5년간 면제되는 특혜를 받았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따라서 일본기업이기에 그 혜택을 받아 한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각종 세재 혜택을 파격적으로 제공받았다.

 

이후 그는 1967년으로 국내에서 롯데제과를 설립을 시작으로 사업을 다른 분야로도 확장하여 1973년 호텔 롯데·롯데 전자·롯데 기공, 1974년 롯데 산업·롯데 상사·롯데 칠성 음료 등을 설립했고, 1975년 롯데 자이언츠를 설립, 1978년 롯데삼강(현 롯데푸드), 롯데건설, 롯데 햄, 롯데 우유(현 푸르밀), 1979년 롯데 쇼핑, 1980년 한국 후지 필름, 1982년 롯데캐논(현 캐논코리아 비즈니스 솔루션대홍기획 등을 설립했다. 또한 1978년에는 롯데크리스탈호텔을 건설하였다.

 

그야말로 한국롯데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다음은 롯데호텔의 탄생 일화이다.

19701113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신격호 롯데총괄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이 날은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돼 제조 정지 명령이 내려진 날인데 박 대통령이 이를 '조치'해주며 호텔롯데를 지어 경영해달라고 신 회장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신격호의 만남이후 불가능했던 호텔롯데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또한 박 대통령은 민주공화당 실세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던 김종필 의원과 양택식 서울시장에게 호텔롯데 건설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했다.

 

호텔롯데 건립은 신격호의 소공동 반도호텔 인수에서 구체화됐다.

신격호는 1974년 박정희 정부의 반도호텔 민영화 계획에 따라 이 호텔을 42억원에 사들였다. 또한 그는 이어 반도호텔 옆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까지 매입했다.

 

이어 신격호는 소공동에 둥지를 틀었던 동국제강, 아서원, 반도조선아케이드 부지까지 몽땅 사들였다. 7천여 평에 이르는 막대한 부지였다. 이 과정에서 신격호의 롯데는 거액의 부동산취득세와 재산세, 소득세 등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 강남 개발에 한창이었던 박정희 정부는 강북 개발 억제를 위해 강북일대에 백화점 건립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이를 비켜가기 위해 지금의 롯데백화점을 '롯데쇼핑센터'라는 이름을 붙여 개장했다.

 

롯데재벌이 탄생한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신격호 회장의 롯데는 급속 성장을 하게 된다.

 

아울러 신격호는 전자 쪽으로도 진출하여 1971년 롯데전자를 세우고 1972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에 롯데의 제과공장단지인 우라와공장을 설립하며 1972년 롯데리아, 1973년 니시신주쿠에 롯데본사빌딩을 건립했다.

 

또한 1985년 롯데 데이타 센타, 1987년 롯데 엔지니어링 등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으며 1988년 일본의 부동산버블로 포브스가 선정한 전세계 부자순위 4위에 오르며 일본의 10대 재벌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한국인중 역대1)

 

신격호가 일본프로야구 구단주가 된 배경은 이렇다.

1969년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의 도쿄 오리온스 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나가타 마사이치 구단주의 요청에 따라 롯데와의 업무 제휴 관계를 체결하며 롯데 오리온스로 개칭한 뒤 1970년에 나가타는 롯데의 구단주를 사임했다.


1971년에는 나가타가 전직 총리 기시 노부스케(나가타의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나카무라 나가요시(기시 총리의 비서관)를 구단주로 취임시켰으나, 나카무라는 그 해 시즌 이후에 니시테쓰 라이온스를 동시에 구매하다가 한 사람이 두 구단의 소유주가 될 수 없다는 일본 프로 야구의 규정 때문에 롯데의 주주를 구단에 바로 반납하며 롯데의 구단주를 사임하였고, 1972년부터 신격호가 본격적으로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서 3대 구단주로 취임하며 재직했다.


199111(1992)부터 그의 차남 신동빈이 지바 롯데 마린스라는 구단명으로 개칭하였다.

 

신격호 회장의 논란적인 개인사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렇다.

한동안 그의 국적은 미스터리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이고 일본에서는 일본인인 기묘한 형태였다. 때문에 편법적 이중국적자로 의심받았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격호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일본과 대사급 외교 관계가 없었던 제1공화국 체제에서는 그의 일본 국적 취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한국 국적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85년까지 이중국적을 허용했으므로 일본 내에서도 그의 한국 국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중국적이지만 이중국적이라 말할 수 없고, 신격호는 한국인이고 시게미츠 타케오는 일본인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한편 신격호 회장의 아버지 신진수는 1968년경 고향을 떠나 1973년 작고할 때까지 서울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8년에서 1969년 사이 울산국가산업단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대암댐(6912월 준공)을 건설하면서 신격호의 마을이 수몰되어 신씨 일가 40여 가구가 이주하면서 대부분 흩어졌고 이때 신진수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마을이 수몰되자 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를 아쉬워한 신격호는 1971년부터 `둔기회`를 만들어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마을잔치를 열고 있다. 첫해 수십 명에 불과했던 둔기회 회원 수도 자손들이 늘면서 지금은 1100여 세대가 됐다.

 

또한 신격호는 형제들에게도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친척이며 신격호 회장과 8촌인 신정호는 그에 대해 "서울로 간 후에도 이곳에 있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논을 사주는 등 친인척들을 많이 보살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신 회장의 선친은 절대 돈 자랑 하지 않았다."면서 "가난한 친인척들에게는 먹을 양식까지 보내주었다."고 회고했다.

 

롯데는 왜 라면을 만들지 않을까? 궁금증이 쌓이는 대목이다. 또 다른 식품기업인 농심은 왜 껌이나 아이스크림을 생산하지 않는가궁금하기도 하다. 그 해답은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 사업만 고수하고, 농심 신춘호 회장은 '라면' 사업만 고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농심의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의 친동생이다. 피를 나눈 형제기업답게 서로 영역을 보장하고 침범하지 않은 것이다.

 

신격호 회장 에피소드 두 구절.

 

신격호는 1941년 만 19살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당시 한국에 임신한 아내를 두고 갔는데 그는 일본에서 중혼을 했다.

 

이 결혼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가 머물던 집 주인의 딸 시게미쓰 하츠코가 그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하츠코의 외삼촌이 바로 시게미쓰 마모루 전 일본 외무대신이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194592일 오전 98분 미국의 전함 미주리호. 항복조인식에서 일본제국의 마지막 외무대신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인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격호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확장하며 승승장구 하면서 1967년 롯데제과를 비롯 계속 여러 회사를 인수해 롯데그룹을 키워나갔다. 당시 신격호는 아역배우이자 1972년 초대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과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이 신유미인데 참고로 서미경과 신격호 나이 차이는 무려 38세이며 거기에다가 딸 신유미는 1983년생인데 태어났을 당시 신격호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그의 자녀와 62살 차이가 나는 것이다.

 

롯데 제국을 탄생시킨 신격호는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 머물며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국내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2006년 포브스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격호 회장 일가의 재산은 약 45억달러로 세계 136위이다.

   

롯데그룹의 성공 비결을 그의 성실함과 꼼꼼한 성격에서 찾는다. 198310, 월간 직장인과 인터뷰에서 기자가 껌 한 통의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는 회장에 대해 놀라자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껌은 23개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 15천 종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 15천 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 그리고 소비자 가격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청년 신격호가 사업의 기초를 쌓게 된 동기도 바로 이러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에서 시작되었다.

 

만약에 신격호가 청년시절 사업초창기 때 사업이 망하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빚더미에 앉아있을 때 광복이 되어 일본을 떠났으면 그의 행운은 거기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격호는 하나미스옹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왜 신격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기업을 시작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돌아갈 고향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 이고, 둘째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돈을 벌어서 모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투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모국 투자를 통해 얻게 된 수익을 해외로 과실송금을 하지 않고 재투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경제가 최악의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도 신격호 회장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계속했다.

 

특히 1997년 말, 일본자본이 한국을 다 떠나게 되고, 결국 달러 부족으로 인해서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IMF 관리를 받게 되자, 신격호 회장은 재계인사로서는 처음으로 2천만 달러의 개인재산을 출자하고, 5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했다. 이런 면에서 애국자 신격호라는 호칭이 붙었다.

 

신격호 회장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위해 매년 열었던 마을잔치를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애도를 위해 중단하였고, 원래 마을잔치를 열려고 했던 잔치비용 전액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기부 되었다.


2015년에는 더이상 마을잔치를 열지 않는다고 롯데 측에서 밝혔다. 이유는 해마다 늘어나는 잔치 참석 인원들로 인한 교통 불편을 주변 주민들이 호소했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투자는 계속 될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해서 대기업을 이룩한 기업인들의 성공요인을 언급할 때 부지런함, 성실함, 신뢰 성, 끈기, 도전정신, 열정 등의 성품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러한 성품 덕분에 역경을 극복하고, 위험을 잘 관리해서 성공을 이룩했다고 한다.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에 대해서도 그런 설명이 많다.

 

신격호 회장의 성공요인은 남다른 부지런함과  일본에서 '조선인' 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하고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안목,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한 것이 오늘날의 롯데 신화를 창조해 낸 것으로 보인다.



김병택 대표  news2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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